[오늘과 내일/방형남]외국인용 ‘행복의 나라’

  • 입력 2006년 9월 28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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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가이어 주한 독일대사가 얼마 전 몹시 아쉬워하며 한국을 떠났다. 그는 서울 성북동 대사관저에서 열린 몇몇 언론인과의 환송 조찬모임에서 “나의 인생 가운데 가장 행복한 3년을 한국에서 보냈다”며 “서울을 떠나는 게 섭섭하다”고 말했다. 인사치레 이한(離韓) 소감이 아니었다. 증거까지 제시했다. 그는 “한국에서 더 근무하고 싶어 외교장관에게 정식으로 임기 연장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새로운 임지인 불가리아 소피아에서도 한국과 한국의 친구들이 생각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이 좋다”고, “서울 생활이 즐겁다”고 한 사람은 독일대사만이 아니다. 워릭 모리스 주한 영국대사도 한국 근무에 크게 만족하고 있다고 한다. 올해 말로 3년 임기가 끝나는 모리스 대사는 1년 연장을 신청해 외교부의 허락을 받았다. 영국 외교부가 독일 외교부보다 관대한 건지, 영국대사가 독일대사보다 유능한 건지 알 수는 없으나 모리스 대사는 가이어 대사보다 오래 ‘행복한 서울 생활’을 누리게 됐다.

두 사람 말고도 더 있다. 서울에서 잠시 근무하는 외국인 대다수가 ‘한국 예찬론’을 편다. 상당한 지위에 있는 외국인에 대한 한국인의 천성적인 친절과 상대적인 후진국에 살 때 얻게 되는 생활상의 편리함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한국에는 주한 외국인들을 즐겁게 하고, 더 머물고 싶게 하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답을 알기 때문에 가이어 대사에게 “무엇 때문에 그토록 서울에서 행복했냐”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십중팔구 주한 외국인들 사이에 보편화된 ‘한국은 결코 지루하지 않은 나라(never boring country)’라는 인식이 그의 서울 생활을 흥미진진하게 만든 요인 가운데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당사자가 아니라 구경꾼일 뿐인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현 상황은 얼마나 재미있을까. 동네북이 되어 버린 대통령,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논란, 법원 검찰 변호사단체의 세력 다툼, 언론과 정부의 끊임없는 대결, 헌법재판소장 임명을 둘러싼 갈등…. 나라 전체가 싸움판이고 사사건건 국민 전체가 내 편 네 편으로 갈려 패싸움을 벌인다. 이렇게 신나는 구경거리가 또 있을까. 자고 나면 새로운 사건이 터진다. 이렇게 재미있는 나라가 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서 요즈음에는 외국인을 만나는 게 부담스럽다. 한국의 중견 언론인으로서 뭔가 내세울 만한 얘기를 하고 싶은데 자존심 상하는 설명이나 해야 하고 구구한 변명을 해야 하니 그들은 신이 나지만 나는 점점 더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한국 생활에 만족한다는 말을 들어도 반가워하거나 기뻐할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도 이렇지 않았다. 비록 정치 후진국에 살지만 많은 국민이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고 있고, 기자들은 언론자유를 위해 나름대로 분투한다는 희망적인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선배 세대가 전쟁터 베트남과 중동의 사막에서 흘린 땀을 토대로 온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매진한 결과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뤘다는 설명을 할 때는 절로 신이 났다.

그 시절 우리에겐 자랑스러운 별명이 주어졌다. ‘한강의 기적’ ‘아시아의 용’ ‘신흥공업국(NICs·Newly Industrializing Countries)’…. 이젠 그런 영예로운 별명도 없다.

추락하는 국민의 사기와 국가 이미지.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보다 더 심각한 국가적 손실이다. 누가 국민의 어깨를 축 처지게 하고 있는가. 누가 한국을 외국인들의 구경거리로 만들었는가. 이 큰 죄를 지은 장본인들이 어떻게 속죄할까 고민이나 하는지 모르겠다.

방형남 편집국 부국장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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