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오명철]獨월드컵과 부국강병의 ‘위대한 세대’

  • 입력 2006년 6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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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이 열릴 때마다 흐뭇해지는 일이 있다. 이 기간만은 세상이 미국이 아니라 브라질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오직 브라질을 제외한 나머지 31개 팀이 서로 물고 물릴 수 있다는 점에서 본선 진출 32개국의 전력을 ‘1강 31중’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월드컵 기간 중 브라질 국민은 세계의 1등 시민으로 당당하게 자리매김 된다.

섭섭한 사람도 있겠지만 이번 독일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이 거둔 성적은 더도 덜도 아닌 ‘실력만큼’이었다고 본다. 토고전은 이겼으나 전반의 졸전과 후반의 공 돌리기로 부끄러웠고, 프랑스전은 최선을 다해 비겼으나 실력보다는 운이 더 작용한 것 같다. 스위스전은 패했으나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떳떳하고 자랑스러웠다. 오심을 탓하는 이도 있으나 “그 또한 게임의 일부”라는 딕 아드보카트 감독의 말처럼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온 국민의 염원인 16강 진출을 이뤄 내지 못한 채 귀국한 선수단을 따듯이 맞아 준 국민의 성숙한 태도 또한 값지다.

한국 축구가 그간 이룬 성취는 결코 작지 않다. 유엔 가맹국보다 많은 전 세계 207개국이 가입한 국제축구연맹(FIFA)에서 연속해서 6번이나 본선에 진출한 나라는 단지 9개국에 불과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는 당당히 4강에 올랐고 붉은악마와 거리응원은 전 세계 축구팬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독일 월드컵 조별리그가 진행될 때 1주일가량 독일에 있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한국 축구 대표팀이 토고(Togo) 대표팀을 2-1로 ‘투고(To-go)’시키는 장면도 직접 지켜봤다. 사상 최초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아프리카의 약소국이 경기장을 가득 메운 한국인의 압도적인 응원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것을 보고 코끝이 찡해지면서 마음이 짠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당시 열차 배 군용기를 갈아타고 총 60시간이 넘는 대장정 끝에 개막 당일에야 현지에 도착한 한국선수단의 모습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서울을 출발한 지 꼭 1주일 만이었다. 주최 측의 실수로 토고 선수단은 두 번이나 한국의 애국가를 들어야 했고, 뒤늦게 토고의 국가가 울려 퍼질 때는 국기가 이미 퇴장해 버리고 난 뒤였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부터 경기가 열린 발트슈타디온은 물론 중심가에도 현대 삼성 LG 기아 등 한국 기업의 광고와 붉은 옷을 입은 한국인들로 넘쳐 났다. 그들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대∼한민국”을 외치며 도심을 헤집고 다녔고, 많은 외국인이 “짝짝짝 짝짝” 하는 후렴을 합창해 주었다. 젊은이들은 밝고 생기가 넘쳤다.

이를 지켜보며 1960년대 ‘눈물 젖고 탄가루 묻은 빵’을 먹으며 이역만리 타국에서 온갖 노역을 마다하지 않았던 파독 광원과 간호사들이 떠올랐다. 1964년 12월 10일 독일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본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함보른 탄광을 찾아 막장에서 막 나온 파독 광원과 간호사들을 격려하는 자리에서 약소국의 설움이 북받쳐 서로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는 얘기가 생각난 것이다. 우리 선수들이 월드컵 원정 사상 첫 승리를 거둔 장면을 지켜본 1세대 광원 간호사들의 감격이야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독일 월드컵을 지켜보면서 독립을 위해 풍찬노숙(風餐露宿)을 마다하지 않았던 애국선열, 나라의 방향을 제대로 잡은 현대사의 지도자들과 이를 헌신적으로 뒷받침한 관료들, 그리고 조국과 가족을 위해 베트남, 중동, 아프리카로 달려간 ‘위대한 세대’에게 새삼 고개가 숙여졌다. 오늘의 대한민국과 한국 축구, 기업과 붉은악마는 이들 ‘위대한 세대’가 피와 땀으로 이뤄낸 값진 유산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들이 남긴 소중한 국부(國富)를 깎아 먹으면서 되레 그들을 손가락질해서는 안 된다. 이들 ‘위대한 세대’를 기억하는 것은 한국 축구의 월드컵 16강 진출보다 훨씬 더 소중하다. 세상 또한 언제까지나 월드컵을 중심으로 돌지는 않는다.

오명철 편집국 부국장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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