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용희]‘당직근무 여성제외’ 성차별 맞나요

  • 입력 2006년 6월 12일 03시 02분


코멘트
남성들이 모였다 하면 하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군대 갔다 온 이야기, 둘째는 축구 이야기, 셋째는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

남성들은 어느 한곳으로 열광하고 달려들기를 좋아한다. 남성들이 군대와 축구에 열을 내는 것은 당연하다. 남성들은 그들끼리의 문화에서, 축구 경기장 같은 세상에서 의리를 지키며 평생 땀을 흘리면서 뛰어다닌다. 같은 편끼리 패스하면서, 정력적으로 골을 넣기 위해. 어쩌면 이를 위해 누군가를 제치고 밀어내야 할지도 모른다.

사실 여성이 사회적 관심거리로 등장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역사의 전면에는 언제나 남성이 있었다. 문명을 이루기 위해 남성들이 사회적으로 훈육되는 동안 그들에게 여성이란 생식과 양육과 쾌락을 위한 조력자였다. 필드에서 뛰다 휘슬이 울리고 타임이 선언될 때 여자를 생각했다. 그들에게도 가끔 안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남성이 여성의 인격을 생각해 주는 것은 백인이 흑인의 삶에 관심을 가지는 것만큼 힘든 일이었는지 모른다.

한국에서도 여성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게 된 것은 저출산이 국가적 현안이 되고부터였다. 1990년대 여성과 성에 대한 관심이 유행처럼 불거졌다. 1998년 외환위기 때는 남성의 가부장적 권위가 무너졌다. 하지만 이때 여성도 상처받기는 매한가지였다. 아이를 가진 주부 사원, 맞벌이 부부인 여성이 직장 내 감원 대상 1호였다. ‘경제적 위기로 가정 파괴가 심각해지고 여성의 사회 진출로 이혼이 늘어났으니 아예 여성을 집안에서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논리는 그야말로 주객이 뒤집힌 발상이다. 모권 존중이란 말을 써 왔지만 실제 한국 사회가 모권에 크게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있었나.

‘당직, 비상근무 시 여성을 빼는 것은 성차별’이라는 최근 국가인권위원회의 의견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근로 의무를 다하고 근로 기회를 부여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양성 평등이 물리적 생리적 영역에서의 평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양성의 신체적 차이는 엄연히 존재한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도둑이 들 경우 여성 당직 근무자가 막아 내기 힘들다. 이런 방식이라면 월드컵의 전사들을 여성과 남성 똑같은 비율로 선발해야 할 것이 아닌가.

성 동등성은 정의로운 방향이지만 그에 이르는 도정(道程)도 섬세하고 정교하게 디자인돼야 한다. 여성이 처한 전체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특정 분야에서만 무차별적이고 즉각적인 동등성을 요구하다가는 양성 평등에서 후퇴하는 결과를 불러 올 수 있다. 굳이 남성 당직 근무가 역차별로 느껴진다면 여성에게 당직 근무를 대신하는 대체 노동을 하게 하는 방법도 고려해 볼 일이다.

때로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때 사람들은 왜 여성과 아이들을 먼저 보트에 태웠을까 생각해 보곤 한다. 1998년 코소보 사태 때 인종 학살을 하면서 왜 수많은 여성이 인종 말살을 위한 집단 성폭행의 대상이 되었을까 생각해 보곤 한다. 왜 사람들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여성을 선택하거나 혹은 여성을 파괴하려 했을까. 여성은 최후의 ‘생명’의 보루이고 지켜야 할 ‘오래된 미래’이기 때문은 아닐까.

저출산의 문제가 단순히 여성 모권에 대한 보호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교육과 복지, 의료와 경제 여건이라는 훨씬 광범위한 사회 제반 구조와 연결돼 있다. 하지만 여성, 모권은 좀 더 궁극적인 인권적 차원에서 존중하고 존중받아야 한다. 남성과 여성은 동등한 인격으로 ‘따로 또 같이’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남성과 여성이 동등해야 한다는 주장을 서로의 신체적 감정적 모든 차이를 획일화하자는 말로 알아들을 정도로 우리 사회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김용희 평택대 교수·문학평론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