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함인희]‘증오에서 축제로’ 선거문화 바꿀때

  • 입력 2006년 5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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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1지방선거를 불과 열흘 앞두고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칼에 베이고 열린우리당 후보는 낫에 다쳤다 하니 납량 특집극을 보는 듯하다. 시선을 잠시 사이버 공간으로 돌려 보면 온몸이 더욱 오싹해 온다. 백주에 버젓이 행해진 테러를 목격하고도 ‘악플’에 악플이 이어지면서 극단적 증오와 폭발적 분노를 쏟아 내고 있으니 말이다. 이번의 돌발적 테러가 선거에 미칠 득실을 따지는 데 급급한 나머지 일각에서 근거 없는 음모론을 슬금슬금 흘리는 모습도 기막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우리는 원인 불명의 분노와 불특정 다수를 향한 적개심이 맹목적으로 분출되는 현장을 자주 목격해 왔다. 폭력과 욕설이 난무하던 시위 현장이 그곳이요, 팽팽한 평행선을 그은 채 어느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집단 이기주의’의 현장이 그곳이다. ‘내 편=선, 네 편=악’이라는 극단적 이분법의 칼을 휘둘러 온 사이버 공간 또한 그 현장이 아닌가.

우리가 느끼는 희로애락의 다양한 감정이 개인의 전유물이 아니요, 사회적 현상이기도 하다는 점에 주목해 온 감성사회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분노와 적개심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해관계를 반드시 관철하고자 할 때 등장하는 감정으로서 집단행동에 강렬한 에너지를 부여해 주는 주요 원천의 하나라고 한다.

다만 ‘일사불란한 합의와 행동 통일’을 미덕으로 삼아 온 한국적 맥락에서 분노와 적개심의 분출이 갖는 의미는 개인적 다양성과 이해관계의 차이를 인정해 온 서구와는 사뭇 다른 듯하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의 분노와 적개심이 분출되는 그곳엔 오래도록 기득권층으로부터 기회를 박탈당해 온 데 대한 서러움, 끼리끼리 뭉쳐 자신들의 파이를 키우는 데만 급급해 온 지도층에 대한 배신감,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주기에 참고 기다려 봐야 나만 손해라는 억울함 등등이 복합되어 폭발함을 그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선거 마당이 분출구를 찾지 못해 부글거리던 감정의 응어리들이 폭발하여 부딪치는 장으로 바뀌는 조짐을 보이는 것은 진정 유감이다. 정치적 경쟁자를 증오하고 저주함은 그 정치문화가 지극히 유아적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 줌이나 다름없을 게다. 다른 견해나 차이를 용납하지 못하며 타협과 관용이 불가능한 ‘닫힌 사회’이다. 다원주의에 익숙한 ‘열린사회’의 대척점에 있는 곳이다. 이번 사건들이 우리 정치를 낡은 모습으로 되돌리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성인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자질이 바로 다른 사람의 시각에서 볼 수 있는 능력이다. 우리 사회도 다양한 집단 간 이해관계의 차이를 조정하고 대화와 협상을 통해 갈등을 관리하면서 사회통합을 유기적으로 유지해 가야 하는 성인기로 접어들었다. 극단적 목소리가 시끄럽지만 그 가운데도 대다수 국민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분화되고 있고 세대정서 또한 끊임없이 세포분열을 거듭하고 있는가 하면 동일한 성별, 지역별, 계층별 집단 내부에서도 다른 목소리들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있어서는 안 될 테러가 터져 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번 선거가 분노가 충돌하고 갈등이 증폭되는 ‘증오의 난장’이 되도록 방치할 수는 없다. 마음 깊은 곳에서 방향을 찾지 못한 에너지가 들끓고 있는 우리네 기질에 비춰 보건대, 분노와 신명은 백지장 하나 차이일 뿐이다. 이제라도 그 에너지의 방향키를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금 마음을 모아 분노가 해소되고 갈등이 봉합되며 진보와 보수가 다채로운 정책 대결을 펼치는, ‘선거가 축제가 되는 정치’로 회귀해 국민의 오랜 갈증이 풀리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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