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충식]다산, 위대한 敗者

  • 입력 2006년 4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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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762∼1836)은 정치적으로 처절한 패배자였다.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서 암행어사도 해 보고, 한 시절 정조(正祖)의 총애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기독교와 서학(西學)에 빠져 있다는 이유로 공격을 받고 18년간을 유배당하는 신세가 된다. 식견과 경륜을 펴지 못한 채 패가망신의 아픔을 삭이는 긴긴 세월. 그 인고(忍苦)의 나날이 그를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대학자’(정인보 선생의 말)로 끌어올렸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 나오는 그의 고통의 편린은 시대의 강을 건너 가슴 저미게 하는 데가 있다. “정치의 잘못을 일깨워 주지 않는 시(詩)는 시가 아니다”, “우리 집은 폐족(廢族)이다. 벼슬은 못하지만 성인(聖人)이야 되지 못하겠느냐. 문장가가 못되겠느냐”, “폐족이 글을 읽지 않고 몸을 바르게 행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 구실을 하랴.” 머나먼 적소(謫所)에서 글을 띄워 자식들을 일깨우고 채찍질했다.

▷“임금의 존경을 받아야지, 총애만 받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임금을 기쁘게 해 주는 사람이 되는 게 그리 중요하겠느냐. 임금은, 얼굴빛이나 살피고, 비위를 잘 맞추는 사람, 벼슬 버리기를 어려워하는 사람, 권력자에게 이리저리 붙는 사람을 존경할 리가 없다. 임금이 첩같이 다루고 노예처럼 부려 먹으려는 존재란 고달프고 힘들기만 할 뿐이니라.” 다산은 너무 오랜 시간 붓으로 저작을 계속해 어깨 통증에 시달릴 정도였다. 편지만 쓴 게 아니라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비롯한 불후의 저작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언관(言官)의 역할과 자세도 말했다. “임금의 잘못을 공격하고, 아래로는 백성의 고통을 알려지게 하고, 잘못된 관리는 물러나게 해야 한다. 모름지기 언관은 편을 갈라 다른 편을 구렁텅이에 밀어 넣는 짓을 해서는 안 되고 지극히 공정하게 일해야 한다.” 7일은 다산이 세상을 떠난 지 170주년 되는 날이었다. 정치기구의 개혁, 지방행정의 쇄신을 외쳤던 다산의 개혁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

김충식 논설위원 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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