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강운]까르푸 10년이 남긴 것

  • 입력 2006년 4월 4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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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물가가 가장 싼 곳은 경북 구미공단이라는 말이 있다.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 등 ‘빅3’ 할인점이 구미공단 내 광평교 근처 반경 1km 안에서 피 말리는 최저가(最低價) 경쟁을 하며 값이 떨어졌다는 얘기다.

최근 이마트가 전국 점포의 생필품 판매가격을 비교했더니 구미공단 내 할인점이 평균적으로 가장 쌌다고 한다.

제조업체가 전국 할인점에 납품하는 생필품 가격은 비슷하지만 구미공단처럼 경쟁이 살벌한 곳의 할인점들은 마진을 일부 포기하더라도 물건 값을 낮출 수밖에 없다.

유통업계는 이를 ‘경쟁 비용’이라고 부른다. 경쟁으로 불가피하게 지출하는 비용이다.

세계 2위의 ‘유통 공룡’ 까르푸가 한국 진출 10년 만에 할인점 사업을 접을 모양이다. 중국에서 1위 자리를 굳히려는 전략적 판단으로 보인다.

매물로 나온 한국까르푸는 또 다른 경쟁 비용을 유발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빅3를 포함해 여러 업체가 인수 의사를 밝히면서 몸값이 높아지고 있어서 하는 말이다.

대부분의 인수합병(M&A) 협상이 그러하듯 파는 쪽과 사는 쪽의 셈법은 다르다. 누가 협상의 키를 쥐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

한국까르푸의 매각은 기존 시장 판도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이마트가 인수하면 할인점 경쟁은 사실상 끝나게 된다. 국내 2, 3위 업체인 홈플러스나 롯데마트가 가져가면 1위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

인수 의사가 있는 모 업체 최고경영자(CEO)는 “비싼 가격에 사자니 부담스럽고, 손놓고 있자니 앞날이 걱정된다”며 “어느 쪽 경쟁 비용이 싸게 먹힐지 저울질하고 있다”며 속내를 털어놨다.

국내 할인점 점포는 3월 말 현재 304개. 이 추세라면 3년 뒤에는 400여 개로 늘어나 포화상태에 이른다는 것이 유통업계의 분석이다.

이미 빅3 중심으로 수십 개씩 용지를 확보해 추가로 할인점용 땅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다고 한다.

용지 확보에 몸이 달아 있는 상황에서 까르푸의 32개 점포가 매물로 나왔으니 이보다 더 절묘한 매도 타이밍은 없을 것 같다.

필리프 브로야니고 한국까르푸 사장이 지난해 4월 “3위 도약을 위해 2008년까지 1조 원 이상 투자하겠다”고 공언한 것은 결과적으로 매각을 숨기기 위한 ‘연막’에 지나지 않았다.

까르푸는 유통시장의 빗장을 푼 1996년에, 세계 1위 미국계 월마트는 2년 뒤인 1998년에 국내에 터를 잡았다. 까르푸의 한국 10년은 유통시장 개방 10년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세계 1, 2위 유통업체들이 한국에서 유독 힘을 쓰지 못하고 있으니 ‘토종 할인점’의 경쟁력을 뽐낼 만도 하다.

한국까르푸는 현지화 노력이 부족했다는 평판을 많이 듣는다. 구매력은 세계 최강이지만 소비자들의 마음을 읽는 데는 한국에 몇 수 뒤졌다. 장사는 못해도 ‘몸 팔아’ 실리를 챙기는 장면에선 외국자본의 영악함이 느껴진다.

중국 진출을 서두르는 국내 유통업체들은 까르푸의 실패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한다.

‘까르푸, 월마트를 누른 실력이면 해외시장에서도 통하지 않겠어?’ 하는 자만은 애당초 버리라는 얘기다. 유통업의 글로벌 스탠더드는 현지 소비자의 마음을 읽고 존중하는 자세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강운 경제부 차장 kwoon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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