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정이현]아쉽지만 충분하다

  • 입력 2006년 3월 20일 04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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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거나, 지거나. 애초부터 경우의 수는 단 두 가지뿐이었다. 6연승으로 WBC 4강에 안착한 한국 대표팀이 준결승에서 또다시 일본과 맞붙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경악했다. 이게 무슨 한일 슈퍼게임인가? 두 번이나 이겼으면 됐지 더 뭘 바라는 거야? 희한한 방식의 대진표에 새삼 기가 막혔다.

준결승전을 앞둔 주말,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3개 방송사가 생중계권을 놓고 삐거덕대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고, 서울시청 앞 광장과 잠실경기장을 시민 응원의 장소로 개방할 거라는 소식도 전해졌다. 이 모든 비장하고 어지러운 열기의 한가운데에서 자꾸만 뒤통수가 스멀거렸던 이유는 야구가 확률게임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야구경기에는 절대 승자도, 절대 패자도 없다. 3전 3승을 거두기에 일본 대표팀은 객관적으로 몹시 강한 팀이 분명했다. 일본의 프로야구 역사가 우리나라에 비해 훨씬 오래되었으며, 4000여 개에 달하는 일본 고교야구 팀의 숫자에 비해 한국의 고교 팀은 50여 개밖에 안 된다는 것 등을 굳이 들춰내지 않더라도 일본 야구의 베이스는 한국의 그것과는 사뭇 차원이 다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먼저 거둔 2승을, 놀라운 정신력과 숨은 저력의 결과라는 말 말고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데 만약 여기서 패배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갑작스러운 야구 붐이 얼떨떨하기만 한, 오랜 야구팬의 한사람으로서 상상만으로도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미 단순한 야구경기를 넘어, 가깝고도 먼 이웃 일본과의 국가적 자존심을 건 한판 대결의 장이 되어버린 WBC 준결승. 여기서 우리 팀이 패한다면 지금까지의 눈부신 성과가 묻혀버리는 건 아닐까. 우리 선수들에게 쏟아지고 있는 환호와 박수가 비난과 냉소로 뒤바뀌는 건 아닐까. 그리고 모처럼 조성된 야구 붐이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건 아닐까.

마침내 게임은 시작되었다. ‘0’의 행렬을 보고 있다가 문득 보름 전 WBC 지역예선 개막전의 광경을 떠올렸다. 대만과의 그 경기를, 나는 시내의 한 김치찌개 집에서 보았다. 점심시간이라 식당 안은 꽉 찼는데 텔레비전 화면에 관심을 보이는 이는 거의 없었다. 옆자리 직장인들이 나누는 대화가 또렷이 들려왔다. “어, 저게 뭐야?” “몰라. 프로야구 벌써 시작했나?” 그때 그분들도 지금 어디선가 열심히 우리 팀을 응원하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결국 경기에 이기지는 못했다. 이번 대회, 대 일본전 전적은 2승 1패. 우리는 준결승에서 탈락했다. 이기거나, 지거나. 애초에 나는 경우의 수가 단 두 가지뿐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이기지 못했어도 도저히 ‘패배’라 할 수 없는 경우가 야구에는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들 인생이 그런 것처럼.

너무 아쉽지만, 이걸로 충분하다. 이제 한국 야구는 또 하나의 귀중한 경험을 간직하게 되었다. 이 기적을 가능하게 해준 김인식 감독 이하 30명의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경의를 표한다. 그들이 한국 야구의 뛰어난 실력을 세계만방에 과시했기 때문이 아니다. 보름 동안 나를, 그리고 우리들을 참으로 행복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야구는 냉정과 열정의 스포츠다. 숨 막히는 정지의 순간과 폭발적인 환희가 수시로 교차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6연승 뒤의 1패를, 겸허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 어쩌면 야구의 본질은 바로 그런 것이기에.

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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