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성희]지금 우리가 배고픈 것

  • 입력 2006년 3월 20일 03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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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물러나는 사임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그동안 국가를 위해 늘 최선을 다해왔습니다. (중략) 중간에 그만두는 일은 결코 한 적이 없습니다(I have never been a quitter).”

얼마 전 이른바 ‘3·1절 골프 파문’으로 물러난 이해찬 전 총리의 변(辯)도 닮은꼴이다. “저는 지금까지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물러나는 이유에 대해서는 표현이 각각이다. 닉슨 전 대통령은 “의회를 설득할 강력한 정치적 지지기반이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한 반면 이 전 총리가 물러난 이유는 “부적절한 처신”으로 인해 “폭우에 흠뻑 젖었다”는 표현처럼, 훨씬 모호하고 시적(詩的)이다.

역설과 회한이 뒤섞인 말의 성찬에서 자신의 불운이 당연한 인과가 아니며 끝까지 우발적 자연현상(폭우)의 피해자로 남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읽는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3·1절에 골프치지 말라는 법이 없으며 자두나무 밑에서 갓끈만 고쳐 맸을 뿐 자두를 땄다는 증거도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그가 자두를 땄는가에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이전에 이 전 총리는 가장 중요한 국민의 코드를 배반했다. 역대 대통령을 밥 짓는 이에 빗대어 ‘노무현 대통령이 110V용 밥솥의 코드를 220V 전원에 잘못 꽂아 고장 냈다’는 항간의 유머처럼 그는 국민의 코드와 맞지 않아 쓸모없어진 전기밥솥과 흡사하다. 코드가 맞지 않는 밥솥을 버리는 것은 당연한 ‘인과’이지 밥솥의 ‘불운’이 아니다.

지금 우리는 격(格)이 그립다. 싸움을 하고 욕설을 해도 격을 갖추어서 해야 한다. 상대방이 격을 무시해도 자신까지 격을 낮춰 맞대응할 필요는 없다. 공이 있는 사람을 비판할 때는 그 공을 일부 인정하는 격을 갖추어야 한다. 한데 청와대든 국회든 도무지 정치인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말이며 행동이 국민이 원하는 격에 맞지 않는다. 정치인의 인격은 나라의 품위와 직결된다. 국회의원의 대정부 질문에 비아냥조로 답하는 이 전 총리의 태도가 국격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지금 우리는 또 인품(人品)이 그립다. 이제는 정말 정직하고 솔직한 사람들이 그립다. 자기가 잘못이 있으면 인정하고 사과하는 허심탄회한 사람들을 보고 싶다. 사람들은 그럴싸한 변명과 합당한 이유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아둔하지 않다. 누구는 들었다는 말을 상대방은 안 했다고 하고, 누구는 했다는 행동을 상대방은 부인하는 일들의 지루한 연속극에 사람들은 지쳐 있다. 안 그래도 과대광고, 느물거리는 홍보, 시커먼 선전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솔직한 사람들이 내는 청아하고 담백한 소리에 사람들은 배고파한다.

지금 우리가 바라는 것은 고양된 문화이다. 어떻게 하면 좀 더 건강하게 먹고, 좀 더 멋지게 꾸미며, 좀 더 즐겁게 살 수 있을까 고심한다. 물건이나 사람에게서도 사람들은 ‘멋’을 추구하고 감성을 중시한다. 당장 손에 만져지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에 눈을 뜬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문화 선진국의 문턱에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한때 우리는 나라의 독립에 배고파한 적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은 내 소원은 첫째도 독립, 둘째도 독립, 셋째도 독립이라고 했다. 한때는 실제로 배고파한 적도 있었다. 하루하루 끼니를 때우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이던 시기가 있었다. 배움에 목말라 한 적도 있었고 민주화에 목말라 한 적도 있었다. 지금 우리가 가장 배고파하는 것은 문화와 품격이다. 역설이지만 우리가 사람의 품격을 추구하게 된 데에는 여야를 막론한 정치인들의 역할이 적지 않다. 온몸으로 참여정부의 이념을 실현하다 물러난 이 전 총리의 공도 빼놓을 수 없다.

자기들의 코드를 고집하고 거기에 맞지 않으면 고장 난 가전제품처럼 살아가라는 리더십은 사절이다. 새로 오는 총리나 임기를 남겨둔 대통령은 국민의 코드와 어긋날 때 자신들도 고장 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현 정부의 품격이 낮다고 느낄수록 앞으로의 지도자는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으로 뽑아야 하겠다는 국민의 열망 또한 커질 것이다.

박성희 이화여대 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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