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문병기]‘납북의 악몽’ 되살리는 협박전화

  • 입력 2006년 1월 14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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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근(68) 진정팔(66) 씨 등 납북자 4명이 북한의 조선노동당과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에게 9일 피해 배상을 요구하며 고소장을 낸 사실이 본보 보도를 통해 알려지자 납북자가족모임사무실에 전화가 쇄도했다.

상당수는 “힘내라” “덕분에 속이 시원해졌다”는 격려의 내용이었다. 한 대법관은 “통일 시대를 대비해 북한법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협박 전화도 많았다. 대부분 “북송 비전향장기수들의 소송에 감정적으로 맞대응해 남북관계를 악화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소송과 관련이 있는지는 더 조사해 봐야 알겠지만 12일에는 북한의 테러 위협으로 경찰의 보호를 받고 있는 납북자가족모임 최성용(崔成龍·54) 대표의 자택에 괴한이 침입하기도 했다.

납북자들은 자신들의 소송을 북송 장기수의 소송에 대한 맞대응으로 보는 시선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한다.

대남공작을 위해 남파됐다 붙잡힌 북송 장기수와 평범한 어민으로 북한에 강제로 납치됐던 자신들의 피해 배상 요구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납북자들의 소송이 남북관계를 악화시킨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수긍하지 않는다.

납북자의 고통은 고소장에 밝힌 대로 북한 정부에 의한 감금과 폭행, 강제노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역대 정권은 납북자를 간첩처럼 바라보면서 그 가족에게 연좌제를 적용해 취업을 제한하고 일상생활을 감시했다.

목숨을 걸고 탈출한 납북자에게 정부는 2000여만 원을 지원하는 데 그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04년 4월 납북자 가족의 인권 침해 실태를 파악하고 진상규명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권고했지만 정부는 지금까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납북자들은 “정부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는데도 고소장을 냈다고 해서 협박 전화가 오는 것을 보면 결국 우리는 남북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라며 서러워했다.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삶을 바꾼 ‘납치의 기억’을 잊으려 노력하는 중이다. 그들의 아픔만큼 얼굴에 깊게 새겨진 주름이 활짝 펴지기를 기대한다.

문병기 사회부 weapp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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