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수형]바다와 물방울

  • 입력 2006년 1월 11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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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고등법원의 Y 부장은 ‘안전한 판사’다. 선배 판사들이 그렇게 말한다. 2001년 Y 부장이 지법 부장일 때 그가 재판한 1심 사건의 항소심을 맡았던 고법의 한 부장은 “Y 부장 판결문을 보면 일단 안심이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Y 부장이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그의 ‘불안’이 중요한 이유인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인식과 판단에 대해 불안해한다. 불안하기 때문에 ‘진실’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고민한다. 지난해 6월 ‘사실인정’에 관한 세미나에서 그는 “사실인정에 대해 자신 없어 하는 법관이 좀 안전한 법관이고 자신감과 확신에 찬 법관은 위험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자신과 확신은 위험한 결과를 낳기 쉽다. 미국 법정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다. 제프리 스트리터 씨는 어느 날 법정 밖에 앉아 있다가 변호사의 부탁을 받고 법정 안으로 들어가 변호사 옆 피고인석에 앉았다. 변호사는 목격자들이 피고인(범인)을 제대로 식별하는지 시험하려고 그렇게 했다. 진짜 피고인은 법정의 다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법정에 들어온 세 명의 목격자는 모두 확신에 찬 어조로 피고인석에 앉은 스트리터 씨가 범인이 틀림없다고 증언했다. 스트리터 씨는 졸지에 유죄판결을 받고 구치소에 수감됐다. 로널드 허프 등의 저서 ‘오판(Convicted but Innocent)’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 책의 저자들은 사실 판단을 하는 배심원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자신감과 확신에 찬 증인’이라고 지적한다. 그런 증인일수록 사실 인식에 오류가 많다는 것이다.

얼마 전 Y 부장을 만났다. 그는 자신이 참석했던 한 법심리학회 포럼에 대해 이야기했다. 심리학자인 J 박사가 참석자들에게 ‘농구 동영상’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6명이 두 편으로 나뉘어 농구 경기를 하는 3분 길이의 동영상이었다. J 박사는 참석자들에게 “패스 횟수가 몇 번인지 세어 보라”고 말했다. 모두 열심히 세었다.

동영상이 끝난 뒤 J 박사는 뜻밖의 질문을 했다.

“화면에서 고릴라를 보신 분 있나요?”

30명 중 2명만이 보았다고 대답했다.

다시 동영상을 틀어 보았다. 1분쯤 지났을 때 큰 고릴라 가죽을 쓴 사람이 코트 한가운데를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절대다수가 농구공에 정신이 팔려 농구공보다 10배 이상 큰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 Y 부장은 이 실험을 겪고 난 뒤 인간의 인식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절감했다고 말했다.

인간의 인식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은 인식 과정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고 듣고 싶고 알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알려고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인식과 판단은 확실하다고 믿는다.

어느 철학자는 말했다. “내가 모르는 것이 바다라면 내가 아는 것은 그 바다에서 퍼 올린 한 움큼의 물방울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 한 움큼의 물방울로 불안과 의심을 해소하려는 게 아닌지….

이수형 사회부 차장 so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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