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81>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10월 8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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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한왕이 무관(武關)을 넘어 진나라의 항복을 받고 그 도읍 함양을 차지한 것은 벌써 4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호기롭게 왕궁으로 들어갔다가 궁녀가 되기 위해 끌려와 있던 소녀들 중에서 우씨 성을 쓰는 소녀(虞姬)에게 눈길이 끌린 적이 있었지만 잠깐 동안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4년, 창칼이 부딪고 화살과 돌이 나는 싸움터를 내달려 왔는데도 한왕은 장량이 그 말을 꺼내자 이내 그녀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만큼 그녀의 청초한 아름다움은 한왕의 머릿속에 깊은 인상으로 새겨져 있었다.

함양 왕궁의 재보와 미녀에게 손대는 것을 번쾌와 장량이 그토록 엄숙하게 말리지 않았다면, 한왕은 어김없이 우희를 그날 밤의 잠자리에 불러들였을 것이다. 나중에 항우가 왕궁의 재보와 미녀를 모두 거두어 팽성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한왕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너무 아름다워 쓸쓸하고 슬퍼 보이던 우희의 모습이었다. 이듬해 제후들과 함께 팽성을 함락시켰을 때도 한왕은 슬며시 우희를 찾아보게 했다. 그녀가 항양의 보호를 받아 팽성을 빠져나간 것 같다는 말을 듣자 그때도 까닭 모르게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이는 듯하였다.

“기억할 듯도 싶소. 그런데 자방은 왜 갑자기 그 일을 물으시오?”

한왕이 애써 마음속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며 그렇게 받았다. 장량이 희미한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항왕은 우희를 거두어 미인(美人)으로 봉하고 총애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지난번 팽성에서 낭패를 본 뒤로는 재보와 미녀들을 거두어 자신의 본진에 가까운 성읍에 두고 지키게 하였는데, 바로 그 우미인(虞美人)이 성고성에 있었습니다. 도성과 맞바꾸어도 아까워 하지 않을 만큼 항왕이 총애하는 우미인인데, 그까짓 재보를 아껴 뺏겨 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한왕이 갑자기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장졸들의 물욕이 실로 큰일을 그르쳤구나. 만약 우미인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면 아버님 어머님을 항왕에게서 구해낼 수 있었을 것을.”

그리고는 이내 엄숙한 군왕의 얼굴로 돌아가 좌우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어서 장수들을 과인의 군막으로 불러 모아라! 항왕이 양(梁) 땅에서 돌아오기 전에 형양성을 함락하고 과인의 부모님을 항왕에게서 구해 낼 방도를 찾아야 한다.”

그게 바로 한왕이었다. 호탕하고 풍류도 알았지만 감상에 빠져 큰일을 그르치지는 않았다.

한왕이 앞서 싸움을 돋우자 다음 날부터 치열한 공성전이 벌어졌다. 한군 10만 명이 형양성을 에워싸고 밤낮없이 들이쳤으나, 성안에 있는 종리매도 만만한 장수가 아니었다. 군민 5만 명을 이끌고 높고 든든한 성곽에 의지해 굳게 지키니 한왕이 아무리 장졸들을 다그쳐도 형양성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안되겠다. 광무산을 지키는 번쾌를 부르고 한신에게도 사람을 보내 관영과 주발만이라도 이리로 보내라고 하여라. 이번에는 반드시 형양을 되찾아 성고 오창과 더불어 관동의 근거지로 삼아야 한다. 아울러 성안에 있는 항왕의 가솔들을 사로잡아 항왕이 부모님을 볼모로 삼고 과인의 손발을 묶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한왕이 그러면서 번쾌와 한신에게까지 사람을 보내려 하였으나 그보다 먼저 이른 것은 패왕이 벌써 돌아오고 있다는 놀라운 소문이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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