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10년 일제 귀족작위 부여

  • 입력 2005년 10월 7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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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귀족령.’ 1910년 8월 29일 일제는 한국의 국권을 침탈하면서 이 같은 이름의 법령을 반포했다. 후작(侯爵) 백작(伯爵) 자작(子爵) 남작(男爵) 등으로 구분해 조선의 귀족을 새로 규정한다는 것이었다.

고려시대 때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등의 호칭을 부여하는 오작제(五爵制)를 시행한 바 있지만 일제의 작위 부여는 분명 조선의 상류층을 회유하기 위한 계책이었다.

한달 반가량 후인 10월 7일. 일제는 조선의 전현직 고위 관리 및 왕의 친인척 76명에게 한일강제합방의 공로에 따라 작위를 수여했다. 후작 6명, 백작 3명, 자작 22명, 남작 45명. 이렇게 해서 국권 상실의 비극과 함께 일본식 귀족 탄생이라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을사오적(乙巳五賊)인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과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은 백작,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과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은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작위뿐만 아니라 은사금도 주어졌다. 후작은 15만 원, 백작은 10만 원, 자작은 5만 원, 남작은 2만5000원. 조선 왕실의 친인척은 이보다 더 많은 50만 원 이상의 돈을 받기도 했다. 한 조사에 따르면 당시의 15만 원은 현재의 40억 원가량 되는 거액이다.

그러나 일제가 은사금을 일시불로 지급한 것은 아니었다. 일단 은사금에 해당하는 공채를 지급하고 총액의 5%에 해당되는 돈을 매년 이자로 지급했다. 그러다 50년이 되는 해에 전액을 현금으로 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50년이 되기 전에 광복이 됨으로써 원금은 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일본식 귀족이 된 조선 귀족의 가족들은 10월 23일 관광단을 구성해 일본 나들이에 나섰다. 일본식 귀족으로 살아가려면 일본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하지만 76명 모두가 일제의 이 같은 회유책에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형조판서를 지냈던 우국지사 김석진(金奭鎭)은 작위를 거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흥선대원군의 둘째 사위였던 조정구(趙鼎九)를 비롯해 한규설(韓圭卨) 유길준(兪吉濬) 홍순형(洪淳馨) 민영달(閔泳達) 조경호(趙慶鎬) 윤용구(尹用求)도 작위를 거부했다. 조선 귀족령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독립 의지를 표명하기 위한 저항이었던 것이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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