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우 칼럼]‘이헌재를 위한 변명’

  • 입력 2005년 3월 9일 18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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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위기의 해결사’라던 이헌재(李憲宰) 경제부총리가 결국 중도 하차했다. 대통령까지 나서 엄호했지만 부동산 투기 의혹이라는 ‘도덕성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이 씨는 “저와 처는 투기를 목적으로 부동산 매매를 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위장 전입과 명의 신탁이란 불법 및 편법 의혹까지 해소하지는 못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유난히 ‘도덕성과 정당성의 정치’를 앞세웠던 노무현 정부에는 부메랑이 된 격이다.

20여 년 전에 산 땅을 팔아 재산이 크게 늘어났다고 해서 무조건 부동산 투기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온당치 않다. 그러나 고위 공직자가 6년 만에 재산을 65억 원이나 불린 것만으로도 여론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아무리 애써도 평생 번듯한 내 집 한 채 장만하기 어려운 서민들로서는 어제 먹은 밥이 온종일 가슴에 얹힐 판이다. 더구나 이 씨는 부동산정책 등 나라 경제를 총괄하는 수장(首長)이 아니던가. 그러니 별 수 없이 옷을 벗어야 했다.

여기까지는 좋다. 고위 공직자가 되려면 능력 못잖게 도덕적 자기관리가 중요하다는 말도 맞다. 그러나 그것을 언제까지 개인의 문제로 국한시킬 수는 없다고 본다. 내가 굳이 ‘이헌재를 위한 변명’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염치 不在’의 세상▼

500년 조선왕조를 이끌어 낸 저력은 염치(廉恥)에 있었다. 청렴하여 부끄러움을 아는 선비 정신은 요즘의 효율성 잣대로만 폄훼할 수 없는 정신적 가치였다. 그 가치가 굴절되고 훼손된 반상(班常) 체제의 종말은 망국(亡國)의 비극이었다. 일제(日帝) 강점하에서도 연명되던 염치는 6·25전쟁으로 사회계급이 붕괴되고 생존의 문제가 발등의 불로 다가오면서 빛바랜 골동품으로 전락했다.

전근대적 사회계급의 붕괴는 민주주의 체제로의 전환을 위해 필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외부에서 수입된 민주주의의 옷까지 그대로 한국인의 몸에 맞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분단된 냉전 체제에서 민주주의란 반공(反共)의 다른 이름이었다. ‘의사(擬似) 민주주의 체제’에서 진행된 근대화는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라는 정신적 가치보다는 ‘잘살아 보세’란 물적(物的) 가치에 함몰됐다.

이런 사회적 풍토에서 염치의 가치는 실종될 수밖에 없었다. ‘빽’과 연줄이 정상적 절차를 휴지조각으로 만들고, 정경유착(政經癒着)의 수직적 구조가 수평경쟁을 가로막는 현실에서 염치를 차리는 것은 곧 무능이고 낙오였다. 가장 부정의(不正義)한 권력이 ‘정의사회 구현’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최고 권력자들이 청와대에서 수천억 원의 비자금을 주무르는 상황에서 위장 전입과 명의 신탁 정도의 작은 불법이나 탈법은 염치를 모르는 일이 아니었다.

물론 정도의 차이가 있고 정직하고 반듯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지난 세월에서 다수의 한국인은 그렇게 염치를 잊고 살아온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2명의 국무총리 지명자가 잇따라 국회 인준을 받지 못했던 2002년, 청와대 인사검증에 참여했던 인사가 했다는 “총리후보 70명 중 개혁성과 도덕성에서 만족스러운 인물은 딱 1명이었다”는 토로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지난 세월 염치 부재(不在)의 한국사회상의 반영일 뿐이다.

▼省察 없는 비난으로는▼

세상은 변했다. 그것이 민주주의 성숙도의 결과이든 인터넷이란 새로운 미디어에 기댄 포퓰리즘의 영향이든 이제 염치없는 이들은 권력과 명예를 누리기 힘들어졌다. 이는 분명한 진전이다. 그러나 특정 인사를 손가락질하고 자리에서 쫓아내는 것으로 자신들의 염치없음을 가리려 한다면 진정한 진전이라고 할 수 없다. 지난 세월 삶의 모습에 대한 성찰 없이 감정적으로 쏟아내는 비난으로는 근본적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 씨를 두둔할 생각은 없다. 그를 위한 변명은 오히려 한국사회 전체에 대한 변명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더는 변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이뤄 나가는 것이다. 요란할 필요는 없다. 제도와 법치(法治)로 염치가 존중될 수 있는 세상을 한걸음씩 만들어 나가면 된다. 그게 개혁이다.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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