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고승철 칼럼]국제 통화전쟁 대비하고 있나

  • 입력 2005년 3월 8일 18시 12분


팬더모니엄(Pandemonium)은 영국 시인 존 밀턴(1608∼1674)의 서사시 ‘실낙원’에 나오는 악마의 소굴이다. 숨 막히는 난장판이 벌어지는 곳이다.

달러 엔 유로 등을 사고파는 외환시장 객장을 흔히 ‘현대판 팬더모니엄’이라고 부른다. 국제뉴스 보도를 보면 이를 실감할 수 있다. 전화기 두어 대를 한꺼번에 들고 고함치는 외환딜러들의 모습에서 치열한 ‘전투’ 분위기가 느껴진다. 딜러는 ‘전사(戰士)’로 불린다. 런던 뉴욕 도쿄 싱가포르 등 주요 외환시장에서의 하루 거래액은 줄잡아 1조 달러.

매일 벌어지는 ‘통화(通貨) 전투’의 배후엔 각국 정부 또는 중앙은행이 있다. 사령관 격인 이들은 국익을 위해 때로는 ‘통화 전쟁’을 감행한다.

1985년 9월 22일 뉴욕의 플라자호텔. 선진 5개국 중앙은행 총재들이 모여 ‘플라자 합의’를 이끌어냈다. 달러 약세, 엔 강세를 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말이 ‘합의’이지 사실상 미국의 힘에 눌려 일본은 억지로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美 저돌적 약달러 전략▼

일본은 수출로 벌어들인 막대한 달러를 갖고 있었다. 그 달러 가치를 2년 새 30% 이상 떨어뜨렸으니 그만큼 일본의 부(富)가 공중으로 날아간 셈이다. 무기가 동원되지 않았지 통화 전쟁이나 마찬가지였고 일본은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 또 미국에 무릎을 꿇은 형국이었다. 물론 일본이 진공청소기처럼 달러뭉치를 빨아들인 것은 미국 덕분이니만큼 미국의 절박한 경제 사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달러가 휴지 되는 날’이란 책이 일본에서 나와 주목을 끈 적이 있다. 일본이 산더미처럼 쌓인 달러를 믿고 으스대도 미국이 달러 가치를 휴지로 만들면 일본은 꼼짝없이 당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현재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2000억 달러로 세계 4위 규모다. 외환위기 때 나라 곳간의 외환이 거의 바닥나 국가부도 위기로 치닫던 상황과 비교하면 금석지감(今昔之感)이 든다. 그러나 달러가 너무 많이 쌓여도 골칫거리다. 길게 보면 대(對)달러 원화 환율을 낮출 수밖에 없고 그러면 한국 수출기업들은 경쟁력을 잃는다.

미국 정부는 달러 약세를 꾀하고 있다. 그래야 미국이 수출경쟁력을 갖춰 무역적자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중국 일본 3국의 외환보유액은 모두 1조6000억 달러. 달러 가치가 떨어지면 한중일은 손에 쥔 금덩이가 은덩이로 바뀌는 셈이 되는 반면 미국은 금 대신 은으로 갚아도 되므로 이익을 본다.

미국과 중국 사이엔 이미 통화 전쟁 전초전인 샅바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은 틈만 나면 중국의 위안화 가치를 올리라고 압박을 가한다. 중국이 환율의 힘으로 미국에 싸구려 상품을 무더기로 수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이런 추세가 지속되면 중국 중앙은행엔 달러가 넘쳐나고 미국은 빚더미에 앉을 것을 걱정하고 있다.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중국 위안화가 점점 인기를 끌고 있다. 홍콩에서는 요즘 웬만한 상점에서 위안화가 통용된다. 일부 전문가는 위안화가 10∼15년 후엔 달러 엔 유로에 이어 제4의 기축통화로 부상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어떤가. 총성 없는 통화 전쟁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는가. 요즘 상태를 ‘공포의 균형’이라고 말하는 전문가들이 적잖다.

▼한국경제 명운 걸렸는데▼

한국은 강 건너 불구경할 처지가 아니다. 한국도 이 ‘전쟁’의 한 당사자이다. 한국경제의 명운(命運)이 걸린 승부의 순간이 갑자기 닥치면 어찌할 것인가. 안타까운 것은 나라의 리더들이 좁쌀뱅이처럼 작은 정쟁에 몰입한 탓에 이런 거대한 국제적 흐름에 너무나도 어둡다는 사실이다. 외환위기의 악몽을 벌써 잊었는가.

고승철 편집국 부국장 che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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