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임채청 칼럼]2004 광화문 送歌

  • 입력 2004년 12월 21일 18시 18분


코멘트
현수막 인심도 곳간에서 나는가 보다. ‘송구영신(送舊迎新)’ 현수막 하나 찾아보기 쉽지 않은 요즘 광화문의 빌딩들이 여느 해보다 썰렁해 보인다. 거기에 입주한 기업들과 그 직원들은 더욱 한기를 느낄 것이다. 몇 곳쯤엔 이맘때 행인들에게 감사와 축복을 전하는 현수막 하나 내걸릴 법도 한데…. 그만한 인사는 차릴 줄 아는 게 ‘대한민국 대표거리’ 광화문의 세밑인정이었는데…. 불황에 겨울나기가 너나없이 여간 힘겨운 게 아닌 모양이다.

왜 그리 화난 사람들이 많았을까

이태 전만 해도 그렇진 않았다. 황홀했던 월드컵축구대회와 치열했던 대통령선거 뒤끝이어서 광화문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세밑 광화문이 심하게 추위를 타기 시작한 것은 작년부터지만, 그것도 작년 다르고 금년 다르다. 불황의 그늘이 갈수록 길고 짙어지면서, 조금만 버티면 형편이 펼 것이라는 희망도 함께 식은 때문이다. 어디 그런 곳이 광화문뿐이랴. 하지만 광화문엔 특별히 음미해볼 만한 무엇이 있다.

그제 저녁에도 광화문에선 잔뜩 화난 듯한 누군가의 격한 연설이 확성기를 타고 울려 퍼졌다. 이어 그 못지않게 성난 듯한 한 무리의 일사불란한 구호가 찬 공기를 갈랐다. 사이사이 그들이 부르는 귀에 익은 노래가 묘하게도 애잔하게 들렸다. 왜 그토록 우리 사회엔 화나고 성난 사람이 많을까 하는, 부질없는 상념 탓이리라.

그끄제 저녁에도 그랬고, 그 전날에도 그랬다. 그리고 내일도 글피도 세상을 향해 뭔가 부르짖고 싶은 사람들이 또다시 무리지어 광화문을 찾을 듯싶다. 근래 일상이 되다시피 한 ‘광화문집회’는 이제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자리를 잡았다. 어쩌면 경제현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경기가 좋으면 아무래도 가슴 답답한 사람들이 좀 줄지 않을까 해서다.

예로부터 나라에 큰일이 생기거나 생기려 하면 광화문이 맨 먼저 술렁거렸다. 99년 전 을사조약에 대한 방성대곡도, 59년 전 광복의 감격도, 39년 전 한일협정을 둘러싼 갈등도 모두 이곳에서부터 물결쳐 나갔다. 조선 말기 국운이 기울자 면암 최익현이 목숨을 걸고 ‘도끼 상소’를 한 곳도 이곳이었다.

오랜 세월 민족의 애환을 지켜본 광화문이지만 2004년처럼 상시적으로 몸살을 앓은 적은 없다. 2004년 광화문을 겨울잠에서 깨운 것은 3월 대통령탄핵에 대한 찬반집회였다. 5월부터는 이라크파병 반대집회가 여러 달 동안 이어졌고, 10월부터 본격화된 국가보안법 폐지 찬반집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쌀시장개방 반대집회, 신행정수도 사수집회 등등 단발성 집회도 끊이지 않았다.

유난스러웠던 2004년은 훗날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 국민적 반목 해소를 위해 극심한 진통을 겪은 한 해로 기억될까, 아니면 곧 닥쳐올 국난 앞에서 우왕좌왕했던 한 해로 기억될까. 그 평가는 생각보다 빨리 내려질 수도 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2004년 우리 사회가 역사의 한 갈림길에 서 있었다는 점이다.

어느 길을 택할지는 전적으로 우리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 앞으로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2004년은 극복될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2004년의 갈등과 반목은 저무는 해와 함께 얼른 묻고 사회구성원 모두가 트인 마음으로 2005년을 맞았으면 한다. 그러한 가능성을 광화문집회에서 발견해 볼 수도 있다.

몹쓸 것은 저무는 해와 함께 묻자

광화문에선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이 지척에서 집회를 가져도 충돌은 없었다. 각자 자기주장을 외치면 그만이었지 상대방을 무리하게 제압하려 하지 않았다. 광화문은 시끄럽긴 했지만 불안한 편은 아니었다. 폭언과 폭력이 횡행한 여의도 의사당과는 달랐다. 의사당도 광화문만 같다면야 이쯤해서 추스르고 다시 시작해도 새해엔 희망이 보일 것이다. 새해엔 행인들을 반기는 현수막이 즐비하게 내걸릴 정도로 나라살림이 확 폈으면 좋겠다.

임채청 편집국 부국장 ccli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