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작두’…인생, 그 불확실성의 변주곡

  • 입력 2004년 11월 5일 16시 52분


◇작두/손장순 지음/312쪽 8500원 범우사

소설가 손장순씨(69)가 단편 9편을 묶은 소설집을 펴냈다. 1958년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온 이래 ‘한국인’ ‘공지’ ‘세화의 성’ 등 화제의 장편을 발표해 온 손씨가 1999년 장편 ‘물 위에 떠 있는 도시’ 이후 오랜만에 내놓은 소설집이다.

깊고 예리한 통찰력과 속도감 있는 문체로 욕망의 실체를 형상화하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는 작가는 이번 단편집에서도 삶의 불확실성과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다양한 테마와 소재로 그려 내고 있다.

첫 번째 작품인 ‘사라진 로그하우스’는 보지 않았는데 본 것 같은, 가 보지 않았는데 간 것 같은 이른바 데자뷔(dejavu·旣視感) 현상을 통해 ‘불확실성이야말로 현대문명을 이끌어 가는 신화’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마지막 작품 ‘작두’는 기계를 유난히 싫어하는 기계치(機械痴)인 중년의 남성 작가가 무녀(巫女)와 사랑에 빠져 대자연 속에서 느리고 자유로운 삶을 선택하는 이야기를 통해 물질문명 속에서 영혼을 상실해 가고 있는 현대인의 내면세계를 짚었다.

오랜만에 단편소설집을 묶어 낸 원로 소설가 손장순씨. 내년에 열정과 사랑을 주제로 한 장편소설을 쓸 계획이라 한다. 박주일기자

이 두 작품 사이에 놓인 ‘나는 불 위를 걸어간다’는 스턴트맨, ‘시간의 그림자’는 복제인간, ‘세 다리를 가진 여자’는 다중인격자에 관한 이야기다.

이 밖에 이데올로기의 허망함을 짚은 ‘당신이 추구하는 것은’, 여성의 섬세한 심리가 빚어 내는 이상성격을 그린 ‘엇박자’ 등은 철학적 주제를 다룬 작품들로 작가의 쉼 없는 실험정신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소재의 다양함보다 작품마다 녹아 있는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하고 열린 작가의 시선에 더 눈길이 간다.

‘안도(주인공)는 무소유의 자유를 만끽하고 싶다. 아내가 재테크를 잘하여 마련한 첨단시설로 편리를 도모한 새 아파트가 불편했던 심리의 저변을 이제야 스스로 알 수 있을 것 같다. 속도를 거부하는 그에게 아내의 발 빠른 물욕과 소유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무척이나 불편했던 것이다. … 자연의 오지 속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비로소 진정한 자아와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것 같다.’(‘작두’ 중)

이번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은 작가가 힘든 시기를 거치며 쓴 것들이다. 남편이 암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가운데, 문예 계간지 ‘라 쁠륨’을 창간해 운영했으나 경제적 손실 때문에 결국 폐간하면서 틈틈이 ‘눈물겹게’ 써 온 작품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4일 만난 작가는 여전히 쾌활했다. 트레이드마크가 된 커다란 뿔테안경과 고운 화장, 화사한 옷차림, 가녀린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커다란 목소리와 직설적 화법은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를 무색게 했다.

작가는 “나 역시 인간의 복잡성, 다중인격, 변화무쌍 때문에 받은 내상(內傷)이 큰데 문학이라는 ‘삶의 거리두기 방법’으로 치유받았다”며 “인생이 별 거 아니라는 생각에 무력해지다가도 기력을 차리는 것은 결국 내가 ‘쓰는 행위’를 통해 가장 큰 존재감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털어놨다. 작가는 내년에 열정과 사랑을 주제로 한 장편소설을 쓸 계획이라고 말했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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