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신예詩人의 깊은 통찰

  • 입력 2004년 9월 10일 17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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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나무 안에 잠들다/길상호 지음/126쪽 6000원 문학세계사

길상호 시인의 시집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는 신예들에게 주어지는 ‘현대시 동인상’ 수상시집이다. 그는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신예다. 그러나 비가 내리기도 전에 미리 젖어 버리기 일쑤인 신예 특유의 서두름이나 과장, 또는 손끝 기교 같은 것이 드러나지 않는다. 절제의 수련을 쌓은 흔적이 보인다. 그의 시의 보법은 안정돼 있지만 전혀 파행이 없어 일면 불만스러울 때마저 있다.

그의 ‘집짓기’ 모습이 그러하다. 그는 이 시집의 시들에서 열심히 한 채씩 집을 짓고 있다. 그에게 집은 무엇인가. 삶의 한 밑그림이며 그 전체다. 그 집들은 때로 충만과 안락의 공간으로, 혹은 결핍과 상처의 공간으로 간절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집짓기 솜씨는 실제 뛰어난 대목(大木)에 견줄 정도다.

못 하나 쓰지 않고도 아귀를 맞췄다는 옛 명장들의 솜씨는 오랜 체험과 눈썰미에서 왔다고 한다. 눈썰미란 깊이 있는 통찰력이다. 그러나 눈썰미는 거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통찰력이 확장해 내는 상상력의 또 다른 공간이 거기에 있다. 초월적인 감응의 직관이 함께한다. 길상호의 시들은 놀랍게도 이를 꽤 깊게 눈치 채고 있다. 그의 출세작이라고 할 ‘그 노인이 지은 집’부터 그렇다. 그는 거의 사실적일 정도로 순서에 어긋남 없이 집짓기의 행위를 찬찬히 기록한다. 전혀 파행이 보이지 않는 안정된 보법으로. 통찰력이 정확하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면 이 시는 실패하고 말았을 것이다. 곧 이어 작용하는 상상력의 운행이 공간을 확장하고, 서정을 상승하게 하고 있다. 집이 또 다른 집으로 태어난다. 다음 대목을 보자.

‘늙으면 찾아갈 길 꿈길뿐인데 밤마다 그 길 젖을 것 같아/새가 뜨지 않도록 촘촘히 기왓장을 올렸다’ ‘가로 세로의 문살이 슬픔과 기쁨의 지점에서 만나 틀을 이루고/하얀 창호지가 팽팽하게 서로를 당기고 있는’ 등에서 우리는 시각적인 이미지를 몸 떨리게 만날 수 있다. 사실적으로 지붕 올리기와 문을 달아 내는 모습이다.

그의 집짓기는 인위적인 차원에서뿐 아니라 자연의 생성 그 자체로 자리바꿈하기도 한다. 어두운 땅 속의 감자 한 알마저 ‘집’으로 다시 태어난다(‘감자의 몸’). 삶의 또 다른 집 감자는 원초적인 생명의 공간이다. 시인은 감자의 눈을 세상을 만난 상처의 흔적으로 보고, 그것을 다시 하나의 웅덩이로 본다. 그리고 ‘그 웅덩이 속에/씨눈이 하나 옹글게 맺혀 있다/다시 세상에 탯줄 댈 씨눈이/옛 기억을 간직한 배꼽처럼 불거져 있다’고 그려 낸다. 생명의 통과제의 과정을 그려 내는 것이다. 눈썰미, 깊은 통찰로 지어진 시인의 다양한 집들을 통해 우리는 삶과 자연의 생멸(生滅)의 공간을 새롭게 만날 수 있다.

정진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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