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07년 ‘헤이그 밀사 파견’ 보도

  • 입력 2004년 7월 2일 20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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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完用氏 드르시오/修身齊家 못한 사람/治國인들 잘할 손가/前日事는 如何턴지/今日부터 悔改하야….”

구한말 대한매일신보는 할 말은 기어코 했다.

일제의 검열과 탄압은 혹독했으나 ‘을사5적’과 ‘정미7적’의 매국 행위를 호되게 꾸짖었다. 1907년 7월 3일, 고종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했다고 보도한 것도 이 신문이었다.

대한제국은 그 이태 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돼 껍데기만 남은 채 ‘밭은 숨’을 내쉬고 있었으되!

밀사 사건으로 고종은 기어이 퇴위(退位)하고 만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친일파들을 앞세워 ‘양위(讓位)’를 가장했으나 왕위를 ‘날치기’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12세에 궁에 들어와 망국(亡國)의 한을 삼켜야 했던 고종.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첫 황제(皇帝)가 되었고, 퇴위한 다음에는 ‘태황제(太皇帝)’가 되었다가 다시 ‘이태왕(李太王)’으로 강등되는 그의 삶은 신산(辛酸)했다.

혹자는 그 굴욕의 삶을 고사성어 ‘와전(瓦全)’에 빗댄다. “어찌 하찮은 기와(瓦)로 구르며 구차한 삶을 부지(全)했던가….”(중국 ‘북제서’)

만국평화회의에 한국을 초청한 것은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였다.

그러나 막상 고종의 밀사들이 헤이그에 도착하자 러시아는 뒤통수를 쳤다.

평화회의 의장국이었던 러시아는 현지에 긴급전문을 보내 이들의 회의장 입장을 막도록 지시했다. 뿐인가. 밀사 파견 사실을 일본에 흘렸다.

러시아는 그때 일본과 비밀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대한제국과 만주, 몽골을 맞바꾸는 비밀협상이 타결되기 직전에 고종의 밀사가 나타났으니 당황할밖에.

그러나 고종은 국제정세에 어두웠고 비밀협상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는 퇴위한 뒤에도 러시아에 ‘망명 의사’를 타진하는 등 기대를 버리지 못했다.

그 얼마 뒤 새로 취임한 러시아 총영사는 본부의 훈령을 받는다. “평화회의에 갑작스러운 대한제국 밀사의 출현은 ‘무질서’를 발생시켰다. 한인들의 항일투쟁 고무발언은 삼가야 한다.”

고종이 ‘변함없는 우정’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니콜라이 2세.

그는 이 훈령 상단에 친필의견을 남겼다.

“공감한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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