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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6월 25일 17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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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삼의 눈.’ 마치 절에서 듣는 화두 같다. 해삼에 눈 따위는 없다.
“이 책은 해삼과 인간 족의 교류사다. ‘해삼과 인간이 서로 응시하듯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을까’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저자는 말한다.
해삼 따위에 대해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을까라고 하면 화를 낼지도 모른다.
“해삼은 역사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소. 나의 시야를 열대 아시아와 아이누까지 넓혀준 것이 바로 해삼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저자 쓰루미 요시유키의 저서목록을 들여다보자. ‘아시아와 일본인’ ‘말라카 이야기’ ‘바나나와 일본인’…. 한마디로 ‘아시아’라는 개념을 붙들고 평생 씨름해 왔다.
그렇다면 왜, 그의 시야를 넓혀준 것이 딴 것도 아니고 해삼일까.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해삼은 열대에서부터 홋카이도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대부분의 바다에서 잡힌다. 반갑게도 처음 해삼을 먹은 인류는 지금의 함경도 일대에 살았던 구석기인으로 추정된다.
둘째, 해삼은 말리면 무게가 95%까지 줄어든다. 마른 상태에선 쉬 상하지 않으므로 교역품목으로 더 없이 좋다.
셋째, 말린 해삼을 다시 불려 먹는 곳은 중국뿐이다. 그나마 예전에는 광둥성 푸젠성 일대에 국한됐다.
요약해 보자. 한마디로 해삼의 길을 따라가면 ‘허브(중심)’와 ‘외곽’의 교류사를 추적하기 쉬운 것이다. 과거 중국의 부(富)가 얼마나 강력한 힘으로 주변 국가들을 흡입했는가. 해삼의 눈으로 한 가지 사례를 찾아보면….
도쿠가와막부시대 초기의 일본은 비단을 대량 소비했다. 그러나 당시 비단은 중국에서 수입해야 했다. 일본은 비단을 얻기 위해 금, 은을 수출했지만 곧 바닥났다.
지배층은 해산물 수출에 눈을 돌렸다. 건해삼, 상어지느러미, 전복…. 이 중 압도적 비중을 차지한 것은 해삼이었다.
“중국 비단에 넋을 잃은 에도 여성들은 자기도 모르게 세계 시장과 연결됐다. 이것을 지탱한 것이 해삼이었다.”
1867년 태평양에서는 제국주의의 영토 재분할이 시작된다.
미크로네시아에 관심을 가진 쪽은 신흥강국 독일이었다. 헬른스하임 등의 상사가 팔라우를 비롯해 각지에 영업소를 열었다. 가장 교역량이 많은 상품은 해삼이었다.

독자는 저자가 일종의 ‘신화 깨기’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서구세력의 유입과 함께 근대적 국제교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라는 신화 말이다.
해삼은 이미 서구가 아시아에 들어오기 전부터 세계적 시장 시스템에 좌우되는 상품이었다., 이른바 ‘근대적 교역’은 예전부터 면면히 이어지던 인간과 해삼의 교류사에 편입되고 이용됐던 것이다.
책의 줄기는 그렇다, 그러나…. 무성하게 달린 잎들을 보는 것도 중요하다. 해삼을 돋보이게 만든 ‘조연’들에게도 눈을 돌려보자.
해삼과 함께 호주의 식민화를 주도했던 상품, ‘고래’가 좋은 예다. 저자는 고래 뼈로 만든 코르셋을 이야기하며 마거릿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까지 언급한다. 가마우지를 이용한 물고기 잡이에서 남방문화의 전달 계통을 추적하고, 전복을 끼우는 꼬챙이의 모양에서 샤머니즘의 영향을 유추해내는 모습은 ‘지적 수다’로서 손색이 없다.
1990년 일본의 권위 있는 학술상인 ‘신초(新潮) 학예상’을 수상한 이 책을 대한 뒤 부러움이 밀려들 수도 있다.
“독서풍토가 얼마나 풍요롭기에, 이런 미시적 주제로 600쪽이나 되는 책을 내서 인정받을 수 있을까.” 그러나 생각을 바꿔보자.
인구 1억2000만명의 일본이라지만 ‘해삼 따위’는 역시 특이한 주제다. 인구 4800만명으로 웬만한 G8 국가에 꿇리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출판계가 아직 들여다보지 못한 영역은 얼마나 많은가.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해삼에 대해 알고싶은 몇가지▼
●어떤 해삼은 외부에서 위협이 오면 ‘큐비에 관’이라는 장기를 토해낸다. 끈끈한 내장으로 적을 휘감는 것이다. 해삼을 해저에 방치해 두면 이 장기는 곧 재생된다.
●건해삼을 만드는 데는 해삼 자체보다 땔감 비용이 훨씬 많이 든다. 피지 섬 해삼산업의 호황기인 1828년부터 7년 동안 50만 입방피트의 나무가 연기로 사라졌다.
●1670년대 씌어진 한국 요리책 ‘음식디미방’에는 해삼을 이용한 찜과 볶음 요리가 등장한다. 중국처럼 건해삼을 불린 것이 아니라 날 해삼을 가열해 사용했다.
●해삼을 찌르는 창에 미늘(갈고리)이 있으면 말릴 때 해삼이 뒤틀려 상품가치가 떨어진다. 미늘 없는 창을 젓가락으로 소면을 집듯이 원호를 그리며 휘둘러 잡는다.
●일본 신화를 기록한 역사책 고사기(古事記)에 해삼이 등장한다. 한 여신이 물고기를 모아놓고 “따르겠느냐” 고 묻는데 해삼만 대답하지 않아 칼로 입을 찢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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