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33년 최승희 도쿄 신작발표회

  • 입력 2004년 5월 19일 18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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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親日), 그리고 월북(越北)!

1930∼1940년대 일제하의 암울한 시기, ‘동방의 백조’로 훨훨 날아올랐던 무용가 최승희.

그의 춤사위에 얹어졌던 역사의 멍에는 이제 걷혀지는가.

2000년 6월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기조차 껄끄러웠던 금기의 한 시대는 저물었다. 남북정상이 나란히 지켜본 ‘쟁감춤’과 ‘물동이춤’은 최승희의 작품이었으니.

1933년 5월 도쿄 청년회관에서 열린 최승희의 신작발표회는 일본열도를 강타했다.

그의 춤은 ‘조선에 대한 그리움’으로 울렁였다. “당신의 춤사위는 우리네 아리랑고개의 너울거림이 아니겠습니까….”

훗날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그의 춤과 혈관 속에 충만한 민족애야말로 조선이 가장 아껴야 할 무엇”이라고 말했다.

그는 마라톤의 손기정과 함께 민족의 우상이었다. 최승희의 열렬한 후원자였던 여운형과 송진우는 두 사람을 초대해 함께 사진을 찍도록 연출(?)했는데, 나라 잃은 백성들에게 희망을 심고자 함이었다.

그는 세계적인 스타였다.

피카소, 마티스, 로맹 롤랑, 장 콕토와 같은 시대의 예술정신들이 그의 춤에 혼을 빼앗겼다.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그의 춤에는 일본의 색, 중국의 율동, 한국의 선이 함께 흐르고 있다”고 극찬한다.

그는 세계지도를 가지고 다니면서 외국기자들에게 ‘조국 꼬레아’의 식민지 상황을 설명해주곤 했다.

최승희 곁에는 남편 안막이 있었다.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출신의 이 좌익사상가는 그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는 ‘사해동포주의’라는 이념 아래 최승희가 정치논리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독려했다.

그러나 일제는 그를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강요에 의한 것이었으나 ‘황군 위문공연’은 광복 후 두고두고 부담이 되었고, 결국 남편을 좇아 월북하고 만다.

남한과 북한, 그리고 일본과 중국을 넘나들며 친일과 반일, ‘친공(親共)’과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의 교차로를 가로질렀던 최승희.

그러나 그는 사람의 몸을 지닌 새였다. 이 매혹적인 새는 그 어떤 이념의 새장에도 묶어둘 수는 없었으니.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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