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63년 ‘풀밭 위의 식사’ 展示

  • 입력 2004년 5월 14일 17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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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가 죽자, 기다렸다는 듯이 예찬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관(棺) 속에 들어가기 무섭게 그의 조상(彫像)이 새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늦은 승리는 뼈아프다. 대중의 어리석음이라니!”(에밀 졸라)

서양의 미술사에서 그만큼 발표되는 작품마다 비난을 받았던 작가는 찾기 힘들다. 평단의 야유와 조롱은 그의 생애와 함께했다.

그러나 또 그만큼 당대의 거장들에게서 환호와 지지를 받은 예술가도 드물었다.

시대의 예술정신이었던 보들레르, 졸라, 말라르메는 그의 그림에서 ‘현대성의 출현’을 느꼈고 청년화가 모네, 피사로, 시슬레는 인상주의를 비추는 한줄기 빛을 보았다.

“스스로가 시대의 인간이어야 한다.” 그게 마네의 신조였고 그는 이를 캔버스에 옮겼다.

마네의 대표작 ‘풀밭 위의 식사’.

1863년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의 ‘살롱전’에 출품했으나 낙선하고, 낙선작들을 모은 전시회에 선보였다.

훤한 대낮에 벌거벗은 매춘부를 등장시킨 작품은 일대 파리의 스캔들이었다. 사람들은 질겁했다.

근엄한 두 신사 사이에서 감상자의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창녀. 사람들은 그 거침없는 시선에서 무언가 들킨 듯한 수치심을 느꼈다. 벗겨진 창녀의 몸뚱이는 당시 부르주아 사회의 위선을 벗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태 뒤 다시 살롱전에서 낙선한 ‘올랭피아’는 화단을 또 한번 들쑤신다.

올림피아 여신을 가리키는 ‘올랭피아’는 당시 창녀들이 즐겨 쓰던 예명(?)이었다. 천연덕스럽게 한 손으로 음부를 가리고 있는 매춘부의 나신을 전면에 내세웠다.

서양 미술사에서 여성의 누드는 신화나 성경의 옷을 걸치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 그것은 분명 이단이었다. “나는 내가 본 것들을 가능한 한 단순하게 그린다. 나는 그것을 보았고, 내가 본 것을 그렸다.”

에두아르 마네.

그는 근대회화의 원근과 양감(量感)을 소멸시켰다. 극단적인 색채 대비와 평면적인 조형을 통해 대상보다는 회화 자체의 구성을 중시하는 현대회화의 형식논리를 성취해냈다.

“마네는 반사되는 빛을 좇아 그림을 그린 최초의 화가다. 이때부터 사물은 전혀 새롭게, 현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마티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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