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박원재/‘자업자득’과 ‘자기책임’

  • 입력 2004년 4월 28일 19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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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일본 사회의 최고 유행어는 단연 ‘자업자득(自業自得)’과 ‘자기책임(自己責任)’이다. 이달 중순 이라크에서 비정부기구(NGO) 활동을 하던 일본인 3명이 무장집단에 인질로 잡히자 집권 자민당의 우익 정치인들은 사전 속에서 두 개의 사자성어(四字成語)를 끄집어냈다. 이들은 “정부가 이라크행을 만류했는데도 고집을 부리다 죽을 지경이 됐으니 자업자득”이라는 논리를 폈다. 한술 더 떠 “자기책임의 정신에 입각해 인질 구출에 들어간 비용은 당사자에게 물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류애의 실천’에까지 주판알을 튕겨대는 모습이 야박하기 짝이 없다.

▷한국 국회가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한 3월 12일 박관용(朴寬用) 의장이 일갈한 ‘자업자득’이 한 달의 시차를 두고 일본에 전파된 셈이다. 자위대 철수를 호소한 인질 가족을 몰아붙이는 용도로 악용된 점만 다르다. 25일의 중의원 보궐선거에서 자민당이 3석을 모두 차지하자 제1야당인 민주당에선 “수권정당의 믿음을 주지 못해 국민에게 외면당했으니 자업자득”이라는 자성론이 제기됐다. 한국의 4·15 총선에서 야당이 패배한 것도 따지고 보면 민심을 읽지 못하고 오만한 데 따른 자업자득이다.

▷북한 김정일 정권이 국제사회의 신뢰를 잃은 것도, 경제난으로 고생하는 것도 자업자득이다.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를 지키는 모습을 보였다면 북한의 안보환경이 지금처럼 꼬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2001년 1월 김 국방위원장이 중국 상하이(上海)를 방문해 ‘천지개벽’에 감탄하며 느꼈던 바를 행동으로 옮겼다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누구를 탓하고 원망할 일이 아니다.

▷용천역 폭발사고로 화상을 입고 병상에 누운 꼬마 환자들의 사진을 보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이 아이들은 북한에서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도 아니고, 자신의 의지로 정치체제를 선택하지도 않았다. 북한 정권의 잘못이지만 핏줄을 나눈 남녘 어른들의 책임도 결코 가볍지 않다. 북한을 어떻게 대하는 게 옳은지를 놓고 몇 년째 입씨름만 거듭하는 사이에 아이들의 ‘민생고’는 더 깊어졌다. 용천 어린이들에게 웃음과 희망을 찾아주는 것은 남쪽 어른들이 ‘자기책임’을 다하는 길이기도 하다.

박원재 도쿄특파원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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