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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4월 23일 17시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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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면 요즘 많은 사람들이 관심 있어 하는 ‘도덕경’ 즉 ‘노자’를 해설한 것이겠거니 여기기 쉽다. 유학(儒學)에 관한 글이 아니면 쓰지 않기로 유명한 저자(서울대 종교학과 교수)가 오랜만에 ‘외도’라도 한 것으로 여길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도와 덕은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의 중심개념이란 점에서 이런 제목을 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비록 그 함의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요즘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책으로서의 ‘중용’과 ‘대학’을 누가 언제 지었으며 그 속에 대강 무슨 내용이 담겨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적어도 지난 500여년간 ‘논어’ ‘맹자’와 함께 사서(四書)라 불리는 필독서였으니 참으로 금석지감을 느끼게 한다. 하긴 사서를 중심으로 한 유가 경서에 담긴 사상이 조선을 망치고 전제군주의 왕권 행사를 옹호하는 데 쓰였다 하니 요즘 같은 민주사회를 사는 데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 사서의 메시지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는 점이다. 공산혁명을 통해 과거의 유산을 깨끗이 청산했다는 중국에서도 비슷한 분위기다. 그렇다, 거기엔 아직도 유용한 그 무엇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이 책은 유가의 경전 가운데서 가장 사변적이고 체계적 주장을 담은 두 책, ‘대학’과 ‘중용’의 핵심 내용과 그 본뜻을 탐구한다. 여기에 세 천재가 출석한다. 그들은 근 2000년 경학사(經學史)에서 각각 한국 일본 중국에서의 대표성을 인정할 만한 정약용(丁若鏞)과 오규 소라이(荻生조徠), 주희(朱熹)다. 이 불세출의 세 천재가 이 책에서 시공을 넘어 유학 핵심 용어의 함의에 대해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논전을 벌인다. 유학자들이 겸양의 미덕을 보이지 않다니? 인(仁)을 행함에 있어서는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말라는 것이 공자님의 가르침이니 어쩌겠는가?
예를 하나 들자. 주희는 도(道)란 모든 사물의 당연히 행하여야 할 이(理)요, 사람의 마음에 갖추어 있는 성(性)의 다른 이름이라 하여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된 덕으로 인식한다. 오규 소라이는 도란 옛 성왕들이 실제로 정치를 베푼 행적에서 이미 드러난 것이라며 그 법도의 구현, 즉 사회적 실천을 강조한다. 정약용은 도란 글자 그대로 길이며 인간을 향한 하늘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라 하여 사회의 규범적 원리나 인간에 내재된 덕으로 보지 않고 초월적 존재의 속성으로 본다.
이 외에도 신독(愼獨), 중용, 성(誠), 대학, 인물성(人物性), 서(恕), 성의(誠意) 등이 공방의 주요대상이다. 그러고 보니 전제 군주 옹호와 아무 관계도 없는 인간의 본질적 문제에 대한 치열한 공방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세 분이 연주하는 교향곡만 들릴 뿐 저자의 연주는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감히 그럴 수 없다는 사양지심(辭讓之心)을 발휘한 것인가?
김언종 고려대 교수·한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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