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아프리카 내 사랑’…절망을 도려낸 ‘우간다 聖女’

  • 입력 2004년 4월 16일 20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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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동딸 도미니크가 네 살 때인 1966년 사파리 여행을 떠나 망중한을 즐기는 루실 티즈데일. 티즈데일은 수술실에서는 한없이 냉철한 의사였지만 교육문제 때문에 아홉 살 때부터 이탈리아의 기숙학교에서 따로 자라야 하는 도미니크 생각을 할 때면 늘 눈물부터 앞세우는 마음 약한 엄마였다. 사진제공 들녘
외동딸 도미니크가 네 살 때인 1966년 사파리 여행을 떠나 망중한을 즐기는 루실 티즈데일. 티즈데일은 수술실에서는 한없이 냉철한 의사였지만 교육문제 때문에 아홉 살 때부터 이탈리아의 기숙학교에서 따로 자라야 하는 도미니크 생각을 할 때면 늘 눈물부터 앞세우는 마음 약한 엄마였다. 사진제공 들녘
◇아프리카 내 사랑/미셸 아르스노 지음 이재형 옮김/439쪽 1만1800원 들녘

1961년 6월 10일 우간다 중북부 굴루의 라코어 병원. 캐나다 몬트리올 출신의 젊은 여자 외과의사 루실 티즈데일(1929∼1996)은 막 끝낸 제왕절개 수술 기록 마지막 줄에 자신의 서명을 써 넣었다. 그녀가 아프리카에서 집도한 첫 수술로 검은 피부의 산모와 사내아이가 목숨을 구했다.

우간다에 병원을 세우겠다는 동료 이탈리아 남자의사의 지원요청을 받았을 때 그녀가 약속한 체류기간은 ‘두 달’이었다. 그러나 티즈데일은 아프리카를 쉽게 떠나지 못했다. 우간다에서 그녀의 마지막 수술이 끝난 날은 1996년 3월 16일. 결국 두달은 35년이 됐다. 이 책은 ‘우간다의 테레사 수녀’로 불리는 티즈데일과 그녀와 함께 ‘의학이란 타인의 고통을 위로하는 수단’이라는 이상을 실천했던 남편 피에로 코르티(1925∼2003)의 일대기다.

의사로서 티즈데일과 코르티가 우간다에서 보낸 35년은 개선보다는 비참으로 향하는 과정이었다. 1965년 1만2000명당 1명이었던 우간다의 의사 수는 1995년 2만2000명당 1명으로 줄었다. 한때 ‘아프리카의 진주’로 불렸던 이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곳으로 전락했다. 독재자 이디 아민의 폭정과 탄자니아와의 오랜 전쟁, 부족간의 끝없는 학살 와중에서 두 사람은 때로 군의 인질이 되기도 하고 눈앞에서 환자가 처형되는 장면을 속수무책으로 목격하기도 한다.

“어리석고 비인간적이며 황당무계한 세력에 의해 결국은 모든 것이 파괴당할 것이라고 믿고 싶은 유혹에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저항할 수 있을까? 우린 희망을 잃어가고 있어.”

그러나 티즈데일과 코르티는 절망 속에서도 돌보아야 할 환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저버리지 못했다. 의사로서 ‘역사의 힘을 거스르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지뢰를 밟거나 총에 맞아 병원에 실려 온 환자의 다리를 정확히 어느 지점에서 잘라야 남은 다리로 균형을 잡고 서서 여생을 살아갈 수 있을지를 돕는 일마저 멈출 수는 없었다. 환자의 신체를 절단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손으로 상처 부위를 헤집어 파편을 꺼내곤 했던 티즈데일은 결국 수술 과정에서 에이즈에 감염된다. 그러나 발병사실을 확인한 뒤에도 16년 동안 더 생존했고 하루 325명의 환자를 진찰하는 강행군도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꿈을 꾸고 실현시키고 사랑할 수 있답니다. 산다는 걸 두려워해서는 안 돼요. 심지어 에이즈와도 함께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티즈데일)

아프리카인들의 삶을 고양하는 선교의사가 되고자 했으나 학살극의 와중에서 종군의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 그러나 티즈데일의 장례식에서 낭독된 복음서의 한 구절은 두 사람이 지상에서의 사명을 이루었음을 잔잔히 증언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원제 ‘Un Reve pour la Vie(삶을 위한 꿈·1997년)’.

정은령기자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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