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재호/令愛와 女工의 눈물

  • 입력 2004년 4월 6일 18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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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한나라당 대표(52)와 최순영 민주노동당 부대표(51)가 지난달 30일 눈물을 흘렸다. 박 대표는 KBS 1TV의 당 대표 연설에 나와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을 회상하며 울었고, 최 부대표는 그런 박 대표에게 편지를 쓰면서 울었다.

박 대표는 “60년대 가뭄이 심했던 어느 날 지방순시에 돌아온 아버지가 식사를 못했다”면서 “어머니가 이유를 묻자 아버지는 한참 천장을 바라보다가 ‘지방 아이들 얼굴엔 버짐이 피어 있고, 빡빡머리엔 기계충이 나 있고, 부모의 손은 못 먹어 퉁퉁 부어 있더라’면서 밖으로 나갔고, 식구들은 그날 아무도 저녁밥을 먹을 수 없었다”고 소개했다. 박 대표는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그 아이들의 눈동자를 잊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어떻게 일으켜 세운 나라인데 이렇게 무너지고 있느냐”고 한탄했다.

최 부대표는 민노당 홈페이지에 띄운 편지에서 “30년 전 당신의 아버지가 대통령으로 군림하던 시절 저는 가발공장에서 일했다”면서 “당신이 청와대에서 귀빈들을 만나며 영애(令愛) 역할을 할 때 당신과 같은 또래였던 우리들은 종일 공장의 먼지를 마셔야 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봄이 오는 길목의 개나리와 진달래처럼 싱그러웠던 동료 공순이들의 20대를 떠올리면서 왠지 모를 서러움에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고 썼다.

최 부대표는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재촉했던 1979년 YH무역 노조 투쟁 사건의 주역이다. 당시 노조지부장이었던 그는 대표적인 여성 노동운동가로 성장했다. 민노당 비례대표 후보 5번이기도 하다. 그와 박 대표가 흘린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한쪽은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근대화 세력의 헌신과 열정을, 다른 한쪽은 그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인권과 고통을 기리는 그런 눈물이었을 것이다. 지난 세월 우리 삶의 두 궤적을 이처럼 극명히 대비시켜 주는 눈물이 또 있을까.

최 부대표는 “청춘을 산업화에 바친 ‘산업전사’의 한 사람으로서 ‘경제발전의 주역이 박정희와 3공 세력’이라는 박 대표의 주장에 모멸감을 느낀다”고 했다. 심정은 이해하나 100% 동의하기는 어렵다. 가난 퇴치라는 국가의 목표를 설정하고 국민을 끌고 간 리더십이 없었다면 당신과 동료들이 흘렸을 땀과 눈물도 제 의미를 갖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반대로 혹독한 근로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일한 당신들이 없었다면 천하의 리더십인들 또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두 눈물은 그래서 소중하다.

이제는 화해했으면 한다. 보혁(保革)의 골 깊은 적대감도 그 연원을 따지면 두 눈물에서 비롯된다. 개발독재시대의 불화와 적의(敵意)부터 해소하지 않고서는 지금의 이념갈등, 지역갈등을 풀 길이 없다. 우리가 적어도 절대빈곤에서 벗어났다고 한다면 그것은 양쪽 모두의 덕이다. 한번쯤 역지사지(易地思之)할 때도 됐다.

총선이 8일 앞으로 다가왔다. 마침 민노당의 국회 입성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다고 한다. 누구든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어 이 불임(不姙)의 정치에 눈부신 새봄이 오게 했으면 한다. 눈물도 물일진대 합쳐지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런 다음 정책 대결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보혁 구도를 새롭게 펼쳐 가라.

이재호 논설위원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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