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84/GDP 1조달러 국가로]<1>實事求是의 시대

  • 입력 2004년 3월 31일 18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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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뛰고 있다. 방향은 국부(國富) 증진이다. 사회주의의 붕괴로 냉전이 끝난 뒤 이런 움직임은 더 뚜렷하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는 나라는 바로 경쟁에서 도태된다. 2002년 기준으로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순위는 세계 12위(4767억달러)였다. 전 세계에서 경제규모가 1조달러를 넘는 나라는 7개국. 한국이 앞으로 세계무대에서 ‘의미 있는 발언권’을 행사하기 위한 1차적 관문도 ‘GDP 1조달러대 국가’로의 도약이다. 그러나 눈을 현실로 돌리면 사정은 그리 밝지 않다. 과연 GDP 1조달러 국가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은 무엇일까. 또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5회에 걸쳐 집중분석한다.》

권태신(權泰信) 재정경제부 국제업무정책관(제2차관보)은 지난해 말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격세지감을 느꼈다.

1994년 출장 때만 해도 러시아는 ‘서비스’라는 개념 자체가 아예 없었던 곳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호텔 객실을 청소해줬다. 식사 때에도 물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직원들이 달려왔다. 권 정책관은 “공산주의의 종주국이던 러시아에서조차 ‘잘살아 보자’는 욕구가 넘치고 있다”며 “경제적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가 세계를 휩쓰는 새로운 이념으로 떠올랐음을 실감했다”고 털어놓았다.

▼관련기사▼

- <2>생산성은 제자리
- <3>정부규제의 폐해
- <4>反기업정서의 덫
- <5>서비스업 후진국

대부분의 나라에서 ‘거대 담론(談論)’의 시대는 갔다.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어떻게 국부를 증진시킬 것인지를 고민하는 실사구시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념 및 계급투쟁, 보-혁이나 종교갈등이 여전히 주요한 사회 어젠다인 곳은 중동과 한국밖에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2004년 대한민국의 현주소=지난달 30일 서울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 앞에서는 때 아닌 ‘위령굿’이 벌어졌다. 민주노총, 전국빈민연합 등 29개 단체는 ‘빈곤해결을 위한 사회연대’ 발족식을 갖고 빈곤 때문에 자살한 사람들을 위한 살풀이굿을 벌였다.

행사 주최측은 “빈곤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부의 상징인 타워팰리스 앞에서 행사를 열었다”고 밝혔다. 사실 타워팰리스 주민들이 ‘타깃’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한 방송사는 얼마 전 타워팰리스 인근에 살고 있는 빈민층을 다루는 프로그램을 방송하면서 이들을 ‘부자 타워팰리스 주민’들과 대비시키기도 했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는 ‘부자 때리기’가 유행이다. 이미 국제사회에서는 용도 폐기된 낡은 이념이 ‘진보’라는 이름으로 득세하면서 총체적 하향 평등주의를 부추기고 있다.

대학 교육도 실사구시와는 거리가 멀다. 현대자동차 유럽기술연구소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전호석(全浩奭)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 시험센터장은 신입사원들의 ‘수준’에 깜짝 놀랐다. 독일 대학생들은 바로 현장에 투입할 수 있었는데 한국 대학생은 회사에서 최소한 1년을 교육시켜야 겨우 써먹을 수 있기 때문. 그는 “대학 교육의 실용화가 시급한 과제”라고 말했다.

▽실사구시 외면이 낳은 것=지난해 경제성장률을 3.1%로까지 추락시킨 노무현(盧武鉉) 정부 첫해의 경제실패를 불러온 것도 이념과잉과 무관하지 않다. 현 정부의 ‘분배 중시’와 ‘가진 자’에 대한 적대감은 투자와 소비를 얼어붙게 한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이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서민층의 살림살이가 가장 어려워졌다.

홍기택(洪起澤)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은 ‘기회의 평등’보다 ‘결과의 평등’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며 “부자들을 몰아치고 적대시하면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손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고소득층의 소비가 위축되면서 자동차와 고급가전제품 등 내구소비재 판매는 급감했다. 올해 들어 중형 및 대형승용차 판매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0∼40% 줄었다. 김기호(金基虎) 대우자동차판매 홍보팀장은 “돈이 있는 계층이 활발히 소비해야 돈이 돌면서 전체 경기도 좋아진다”고 말했다.

▽‘한국호(號)’, 어디로 향하나=경제성장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가지는 동시에 이를 가로막는 걸림돌을 제거하는 것이 ‘GDP 1조달러 국가’로 가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특히 시대착오적 이념에 대한 집착이나 반(反)시장경제적 대중인기영합주의(포퓰리즘)로는 미래가 없다는 데도 동의한다.

1900년까지만 해도 1인당 소득에서 독일을 앞섰던 아르헨티나가 새로운 성장동력을 발굴하지 못하고 부패와 갈등, 포퓰리즘 속에서 추락해간 것은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될 만하다. 2002년 기준으로 아르헨티나의 경제력은 한국의 4분의 1 수준에 머물고 있다.

한국 경제는 한때 성장 속도에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지난해처럼 주춤해서는 1조달러 국가로 가는 길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 손길승(孫吉丞) 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은 지난해 7월 “한국의 GDP가 1조달러는 돼야 앞으로 동북아에서 최소한의 역내(域內) 협상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오문석(吳文碩) LG경제연구원 상무는 “한국 사회는 여전히 이념과 명분에 집착하고 있다”며 “자칫 한국만 실사구시라는 세계적 조류에서 ‘고아’로 뒤처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진희(韓震熙)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생산성 향상을 통해 잠재성장률을 높이고, 열심히 일하면 확실한 보상이 주어지는 시장경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장 있어야 분배도 있다/이언오 전무▼

언제부터인가 우리 경제 곳곳에서 긴장도와 집중력이 떨어지는 징후가 발견되고 있다. 성장보다는 분배, 자유보다는 평등, 미래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는 모습 등이 그것이다.

분배와 평등이라는 정치적 담론의 과잉 속에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실리를 추구하는 생산적 담론이 비켜 서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성장은 여전히 중요하다. 지금 국제 경제는 ‘적자(適者)’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치열한 생존경쟁이 진행 중이다. 세계 경제의 블랙홀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 10년의 장기터널을 빠져나온 일본, 동남아의 맹추격 등 생각만 해도 숨이 가쁘다. 굳이 대외 환경의 거센 변화를 들지 않더라도 분배와 평등이라는 담론의 완성을 위해서도 지속적인 성장은 필수적이다.

과거의 성장이 파이의 크기만을 키우는 양적 성장이었다면 앞으로의 성장은 양적 성장이 방치해 온 고령화사회, 복지사회, 통일 이후 사회를 대비한 질적 성장이다. 이는 개발도상국과 선진국을 가르는 경계선이기도 하다. 이 같은 질적 성장은 대의나 명분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최근 한국 사회의 에너지는 새로운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창조(Create)보다 나누기(Share)에 온통 쏠려 있다.

그 와중에 경제활동의 주체인 기업과 기업인이 비윤리적 집단으로 일방적으로 매도되고 있고 경제는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이른바 ‘가진 자’의 탈(脫)한국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경제는 페달을 밟지 않으면 쓰러지는 ‘두발 자전거’다. 한국 경제가 한 단계 성숙하기 위해서는 창조를 한 이후에 나눔을 이야기하는 ‘CS(Create and Share) 사회’로 가야 한다.

이언오 삼성경제연구소 전무

▼中-인도-아일랜드의 경우▼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 있는 정부청사 ‘윌튼 파크하우스’. 외국기업 유치 업무를 맡고 있는 아일랜드산업개발청(IDA) 등 정부기관이 입주한 청사 현관에는 ‘이색적인 간판’이 2개 붙어 있다. 로펌인 ‘휘트니무어 앤드 켈러’와 컨설팅 회사인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이다.

‘정경 유착’ 시비가 생길 법도 하지만 아일랜드 정부는 개의치 않는다. 투자를 위해 찾아온 외국기업에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인허가에서부터 법률 및 경영자문 서비스까지 각종 투자 관련 업무를 한 건물 안에서 처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는 것.

1980년대 말까지 ‘서유럽의 지진아’로 통했던 아일랜드가 불과 10여년 사이에 유럽연합(EU)의 ‘우등생’으로 달라진 배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쓸데없는 ‘권위’나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아일랜드식 ‘실사구시’인 셈이다.

덕분에 아일랜드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기업하기 좋은 나라 중 하나로 꼽힌다. 인텔과 IBM, 마이크로소프트, 화이자 등 1000개가 넘는 첨단 외국인 투자 기업이 진출해 있다.

인구 390만명인 아일랜드가 작년 한 해 유치한 외국인 직접투자액이 417억달러로 한국(64억달러)의 6.5배에 이른다. 인구 12억명에다 ‘외자 유치의 성공사례’로 꼽히는 중국의 570억달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중국도 경제 발전을 위해 자국(自國) 인재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버리고 ‘

외국인 인재’ 유치에 나섰다. 올해부터 중국 경제에 기여도가 높은 외국계 기업 임원이나 기술자들에게 ‘그린카드’를 발급해 자국인과 같은 혜택을 주겠다는 것. 강한 자존심을 특징으로 하는 중화(中華)사상 대신 ‘돈이 되면 외국인이라도 괜찮다’는 실용주의를 선택했다.

오랫동안 사실상의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유지했던 인도도 마찬가지다. 인도 정부는 최근 3년간 부실 공기업 34개를 외국이나 민간자본에 매각해 효율성을 높였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기업 매각이나 합병 문제가 단골 메뉴로 나오면서도 지지부진한 한국과의 차이를 볼 수 있다.

▼특별취재팀▼

권순활 경제부 차장(팀장)

공종식 송진흡 신치영 고기정

차지완 김창원 기자(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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