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85년 고르바초프 서기장 선출

  • 입력 2004년 3월 10일 18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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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3월. 54세의 최연소 정치국원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된다.

그의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안드로포프와 정적 체르넨코의 짧은 치세(治世) 뒤끝이었다. 흐루시초프가 뿌렸던 해빙의 씨앗이 17년에 걸친 ‘브레즈네프의 얼음장’을 뚫고 싹을 틔우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이 ‘세계사적 개인’이 장차 어떤 지도를 그려나갈지 알지 못하였다. 그가 집권한 지 4년 만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그 얼마 뒤엔 소연방의 해체를 지켜봐야 했으니!

그는 흐루시초프의 사상적 적자(嫡子)였다. 공산당의 현대화,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지향했다. “우리는 변해야 합니다. 내일을 살아야 합니다.”

동서(東西) 냉전의 견고한 껍질을 깨고 마침내 ‘노보에미슐레니(신사고·新思考)’의 용암이 솟구친다.

1988년 고르비는 일방적으로 국방비 삭감과 50만명의 소련군 감축을 선언한다. 그리고 동구를 소련의 사슬에 묶었던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했다. ‘시내트라 독트린’이라는 새로운 자결원칙에 따라 동구는 민주화의 ‘마이 웨이’를 간다.

영국의 대처는 “말이 통하는 크렘린 지도자를 만났다”고 반색했다. 그의 세련된 매너에서 ‘철의 여인’은 본능적으로 탈(脫)공산주의의 냄새를 맡았다. “그는 플라톤 정치철학의 도를 터득했다.”(타임)

“그러나 소련은 너무 일찍, 그리고 너무 빨리 민주주의에 편입됐다. 고르비는 개혁의 와중에 통제력을 잃고 말았다.”(스칼라피노)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는 스스로의 가속도를 견디지 못하고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소련은 1917년 러시아혁명 때와 흡사한 혼란과 불안에 휩싸였다. “고르비는 ‘2월혁명’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온건사회민주주의자 케렌스키의 딜레마에 빠졌다.”(워싱턴포스트)

선택은 분명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진정한 혁명이었다.’ 그리고 역사는 고르비의 온화한 미소 속에 ‘철의 이빨’을 감추고 있었다. 그것은 고르비조차 원치 않았던 옐친이었다.

1991년 ‘충분히’ 예상되었던 보수파들의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그리고 옐친이 고르비를 구했을 때 그의 시대는 끝나 있었다.

“휴지통에 내던져진 공산주의의 역사에서 그는 최후의 로맨티스트였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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