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65년 영화감독 이만희 구속

  • 입력 2004년 2월 4일 19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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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영화’가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1965년 2월. 베트남 파병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직후였다.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한 베트남전은 체제 전복에 대한 공포를 키웠다. 곳곳에서 불온세력에 대해 철퇴가 내려졌다.

이만희 감독의 ‘7인의 여포로’는 북한군을 너무 ‘삐까뻔쩍하게’ 그렸대서 문제가 됐다. 이 감독은 얼마 뒤 풀려났지만 불똥은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이 감독을 옹호했던 유현목 감독이 ‘동조자’로 찍혔다.

여론을 의식한 검찰은 유 감독에게 ‘음화(淫畵)제조’라는 죄명을 덧씌웠다. 영화 ‘춘몽’이 여배우 박수정의 누드장면을 찍었다는 것. 이 장면은 자진 삭제됐으나 담당검사는 영화에 나오지도 않는 홍보용 스틸사진을 들이대며 다그쳤다.

누가 4월을 보았다 했는가.

4·19혁명으로 잠시 맛보았던 ‘스크린의 자유’는 5·16군사정변의 군홧발에 무참히 짓밟힌다. 한 손에 영화법을, 또 다른 한 손에 가위를 든 문화공보부의 난도질은 무자비했다.

처음 그 단두대에 오른 것이 유 감독의 ‘오발탄’이다. 4·19의 함성이 역사속의 ‘오발(誤發)’로 묻히고 말았듯 영화 ‘오발탄’도 상영도중 극장 간판을 내려야 했다. 북녘에 고향을 둔 노모(엄앵란)가 내뱉는 대사 “가자, 가자”가 월북(越北)을 암시한다던가.

관객들은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를 만나기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한국영화는 참으로 고단한 ‘이데올로기의 지뢰밭’을 건너야 했다.

이제 충무로는 자유를 얻었다.

‘공동경비구역 JSA’에 앞서 제작된 ‘쉬리’는 북한 특수공작원 박무영(최민식)을 무장공비가 아닌, 할리우드 액션영화의 주인공으로 ‘소비했다’. ‘간첩 리철진’은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블랙코미디의 무대로 삼았고 ‘휘파람 공주’는 이념문제를 통속화하기에 이른다.

1000만 관객몰이를 하고 있는 ‘실미도’에서는 그 처절한 역사의 아픔마저도 충무로의 ‘흥행 코드’에 녹아든다.

‘돈’이 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흥행의 논리는 냉전의 논리마저도 삼켰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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