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오명철/"제발 공천받지 마세요"

  • 입력 2004년 2월 3일 19시 44분


코멘트
각 당의 4·15총선 공천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일찌감치 단수후보로 공천이 확정된 사람도 있고 전국구로 내정돼 표정 관리를 하는 이들도 있다.

이 와중에 각 당이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를 다하며 영입에 나섰지만 본인의 완강한 고사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참 고마운 사람들이다. 우수한 학생들이 성적순으로 서울대 법대나 의대에 진학하는 것이 나라의 장래를 위해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것처럼 각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줄줄이 정치판으로 가는 것은 대한민국 국력과 인재의 낭비다. 깨끗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가면 정치판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 본성과 정치에 대한 몰이해와 한국 정치현실에 대한 착각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지난 수십년간 각 부문의 참신한 인재가 그럴듯한 명분과 설득에 넘어가 정치에 발을 담갔다가 뜻을 펴보기는커녕 평생 소중하게 일군 성취를 일거에 날려 보내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목격했다. 최근 불법 대선자금을 전달한 혐의로 구속돼 ‘감옥소’로 향한 왕년의 의식 있는 성공회 신부 이재정 전 의원의 사례가 이를 단적으로 입증한다. ‘한국의 빌 게이츠’로 불리던 한글과컴퓨터 이찬진 사장도 1996년 신한국당에 입당해 97년 말 전국구 배지를 달았지만 6개월도 못 버티고 98년 5월 의원직을 사퇴했다. 각 분야의 진정한 고수(高手)와 실력자들은 해당 분야에 있을 때에만 빛을 발하는 법이다. 언론계만 해도 대(大)논객은 결코 정치에 몸을 담그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누가 어떤 명분과 감언이설로 꾀든 절대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인물들이 있다. 감성적 리더십과 소신으로 장관도 연예계 스타 못지않은 사랑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 강금실 법무부 장관, 시민운동의 정도를 가기 위해 애써온 박원순 변호사, 여성 프리미엄에 기대지 않고 자기 분야에서 당당히 일가를 이룬 언론인 장명수씨와 이인호 전 러시아 대사, 80년대 서울대 학생회장 출신으로 고시 3과에 합격하고도 재야에 머물고 있는 386세대 이정우씨, 한국 벤처신화의 상징인 다음커뮤니케이션 이재웅 사장, 디지털문화의 전도사인 20대 천재 여성과학자 윤송이 박사 같은 이들이다.

그들이 자기 분야에서 차지하고 있는 입지는 국회와 정치판의 어떤 자리보다 크고 소중하다.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에게 인생에는 정치보다 소중한 것이 너무나 많고, 대통령보다 크고 위대한 업적을 낼 수 있는 직업 또한 수두룩하다는 것을 각인시켜 주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정치판에 발을 담그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럼 누가 정치를 하느냐고?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피(血)로 집권한 쿠데타 세력도 얼마든지 동조세력과 지식인들을 불러 모을 수 있었던 것이 우리 현대사였다. 호시탐탐 정치권 진입을 노리는 관료는 물론 기업 언론 대학 문화·예술·연예계 및 운동권 등에 위장 취업한 정치예비군도 처치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난세(亂世)에는 이름을 날리는 것보다 이름을 지키는 것이 더욱 소중하다.

오명철 논설위원 oscar@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