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박태호/농업 '미래전략'이 없다

  • 입력 2004년 1월 9일 18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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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호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국제경제학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의 국회 비준동의안 처리가 또다시 무산됐다. 농촌지역 출신 국회의원들이 다가오는 총선을 의식해 안건 처리 자체를 못하게 막아버린 것이다. 이들에게는 단지 총선만이 관심사고 우리의 수출과 대외신뢰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각 당의 지도부도 어정쩡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어 국민을 더욱 실망시키고 있다.

우리의 이 상황에 대해 칠레측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고, 대한(對韓) 감정도 나빠지고 있다고 하니 우리나라가 과연 세계 12대 무역국인지를 의심케 된다.

▼FTA 관련대책 못믿는 농민들 ▼

그러나 이번 한-칠레 FTA 문제가 단지 총선이라는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농민단체와 대화하고 국회를 방문해 설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과가 나왔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우리 농민은 쌀 시장 개방을 초래한 우루과이라운드(UR) 협정을 받아들인 바 있다. 한-칠레 FTA는 포도 사과 배 등 칠레의 주요 수출 농산품을 예외로 하고 있어 우리 농업에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그런데도 우리 농민들이 한-칠레 FTA에 대해 일관되게 반대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우리 농업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UR를 수용하면서 정부는 농촌과 농업에 막대한 지원을 했지만 그 결과는 어떠한가. 수십조원의 정부 지원금이 결국 농가의 추가적인 빚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농민은 잘 알고 있다. 이런 경험을 한 농민이 이번 한-칠레 FTA에 따른 지원특별법 등의 대책을 어떻게 다시 믿을 수 있겠는가. 농민은 한-칠레 FTA 자체를 반대하기보다 정부 지원대책의 실효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지원금 규모도 문제지만 지원대책의 내용이 UR 때와 같이 졸속으로 이뤄졌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현재 정부의 방식으로는 아무리 새로운 대책을 내놓는다 해도 농촌과 농업이 더 나아질 게 별로 없다. 그 이유는 정부의 대책에는 우리 농업이 나아가야 할 장기비전과 전략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결과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반도체 조선 철강 자동차 전자 등의 부문에서 세계 일류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이런 성과는 이들 분야에 많은 투자가 이뤄지고 동시에 수많은 학자와 전문가들이 이 분야에서 집중적으로 연구·기술개발을 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농업은 그렇지 못하다. 농업 지원대책은 대부분 ‘선심용’에 그치고 기초 연구·기술개발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우리 농업의 미래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저리의 자금을 융자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농업의 미래를 연구하고 첨단 농업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를 위해 세계적 수준의 학자와 전문가들이 농업연구에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반도체산업을 이끌어가는 고급인력과 같은 수준의 연구·기술개발 인력이 우리 농업 분야에도 투입돼야 한다.

▼'국가농업연구소'등 검토해볼만 ▼

시간이 많이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정부지원이 결국은 농가 빚으로 귀결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농업을 살리는 길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 농업이 나아가야 할 장기비전과 전략을 수립하는 ‘국가농업연구소’를 설립하는 방안을 검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연구소에는 필요하다면 외국의 학자와 전문가들도 참여시켜야 할 것이다.

한-칠레 FTA의 국회 비준동의안은 국회에서 조속히 처리돼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는 의원들과 정부관계자, 그리고 전문가들이 국가적 차원에서 우리 농업의 미래 전략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토론하는 작업이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

박태호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국제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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