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삶]최성현/산속에도 '친구'는 많아요

  • 입력 2003년 11월 28일 18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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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바람이 드세게 분다. 기온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그릇 안의 물이 낮부터 얼기 시작했다.

한낮에 두꺼운 옷을 입고 당근과 야콘을 캐서 갈무리했다. 이것으로 가을걷이도 끝났다. 얼마 전에 김장도 했다. 장작도 틈틈이 준비를 해놓아 충분하다. 지난해 겨울 산림청에서 솎아 베어놓은 나무가 걸어서 5분이면 갈 수 있는 동산에 가득 널려 있다.

시월에 한 아우가 와서 방 하나를 춥지 않도록 새로 꾸며줬다. 나중에 나도 그만큼 그 아우의 일을 도왔으니 품앗이를 한 셈이지만, 아우가 먼저 와서 해주었으니 그렇게 말해야 한다. 그만두라는 걸 우겨서 가서 했다. 도배는 충주 사는 장 선생 부부가 와서 해주셨다. 괜찮다고 해도 남은 도배지가 있다고 하며 밀고 들어와서 아주 새 방이 됐다. 정갈해서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다. 이렇게 겨울 준비를 마쳤다.

이웃집도 없는 깊은 산속에서 홀로 살고 있다. 절이 오히려 한참 아래 있으니 얼마나 깊은 산골인지 짐작이 가리라. 그래서 지내기 좋은 한여름에도 방문객이 별로 없다. 겨울에는 아예 인적이 끊긴다. 일주일 내내 홀로 있는 것은 예사고, 한 달 내내 사람 구경을 못 하는 때도 있다.

이렇게 살면서도 그다지 외롭지 않으니 나도 이제 산 생활에 이골이 나 가나 보다.

하루의 반은 집안에서 번역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혹은 가만히 앉아 있거나 하며 지내고, 나머지 반은 바깥에서 몸을 움직이는 일을 한다. 얼마 안 되지만 먹을 농사를 짓고 있어 할 일이 적지 않다. 일이 없을 때는 주변의 산을 한 바퀴 휭 하니 돌고 온다. 이렇게 안과 밖에서 하는, 이 두 가지 일의 조화가 절묘하다. 하루 종일 방안에만 있으면 갑갑할 테지만 바깥에서 한나절 일을 하다가 들어오면 다시 방안의 시간이 싱싱해진다. 반대로도 같다.

주변에 사는 나무, 풀, 새, 벌레, 야생짐승, 민물고기들이 모두 다 친구다. 사람이 없는 만큼 그들이 필요하다. 늘 도감을 가까이 두고 있다가 모르는 친구를 만나면 찾아 이름을 익힌다.

어제부터 날이 추워지기 시작했는데, 그 전까지는 한꺼번에 여러 마리의 땅벌이 밥 먹을 때면 꼭 와서 같이 먹었다. 밥상을 차리면 어떻게 아는지 금방 알고 온다. 와서는 밥상 위를 샅샅이 뒤진다. 특히 단물이 나는 걸 좋아해서 내가 사과를 먹을 때면 내 입에도 앉고 한 입 베어낸 사과에도 앉아 같이 먹는다.

그럴 때는 밥상 위에 서너 마리, 손에 한두 마리, 입가에 한 마리, 아주 벌 천지다. 입에 앉는 것은 입가에 묻어 있는 사과즙 때문이다. 그때는 다 핥아먹고 가도록 꼼짝 않고 있어야 한다. 참기 어려울 만큼 간질간질하지만, 절대로 괜히 쏘는 법은 없다. 그래서 땅벌이 날아와 내 몸 어디에 앉건 나는 조금도 겁이 나지 않는다.

사방에 어둠이 내린 지금도 거세게 바람이 불고 있다. 낮에 밭일을 하다가 가끔 허리를 펼 때면 내 눈길을 사로잡곤 하던 밭가의 나무들이 생각난다. 나무는 거친 바람을 맞받지 않고 부드럽게 받아 안으며,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하고 사람을 만나야 하는지를 내게 일러 주고 있었다. 산중에서는 이렇게 나무나 새 혹은 벌레로부터 큰 가르침을 얻는 일이 있다. 그래서 나는 아침마다 학생의 자리로 나를 낮추는 작은 의식을 거행하고는 한다.

이 외진 곳에도 아주 가끔 하나님이 오신다. 물론 사람 모양을 하고 오신다. 겉모습에 감쪽같이 속을 때도 많지만 떠나신 뒤에라도 그분이 하나님이었음을, 알기는 반드시 안다.

1956년생. 대학원에서 노장철학을 전공하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근무하다 자연주의 사상에 매료돼 1988년 박달재 근처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자신이 먹을 것을 스스로 농사지으며 혼자 살고 있다. 일본어 번역을 하는 틈틈이 자기 글을 쓰고 있으며 최근에 낸 책으로는 ‘바보 이반의 산 이야기’(도솔)가 있다. 이 밖에 ‘더 바랄게 없는 삶’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공역) 등 많은 역서를 냈다.

최성현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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