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천광암/'신종 꺾기'

  • 입력 2003년 9월 17일 18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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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 벤처기업가인 정문술 전 미래산업 사장은 연 24∼30%에 이르는 비싼 사채를 빌려 기업을 일으켰다. 사업 초기에 은행돈을 몇 번 써본 뒤 은행과는 아예 등을 돌렸다고 한다. 은행에서 돈을 빌릴 만한 신용이 없어서가 아니다. 은행에서 이런저런 설움을 당하느니 이자를 더 내고 사채를 쓰는 게 속 편하더라는 것이다. 부대비용을 감안하면 은행 대출이자가 싼 편도 아니었다고 그는 말했다.

▷대출과 관련된 은행의 횡포 가운데 대표적인 게 ‘꺾기’다. 이는 은행이 대출을 해 주면서 대출금의 일정액을 떼어내 예금을 들도록 강요하는 행위를 말한다. ‘꺾기’를 당한 고객은 이중으로 불리하다. 우선 실제 쓸 수 있는 대출금이 줄어든다. 또 예금금리는 낮은 반면 대출금리는 높아서 실질적인 금리부담이 크게 늘어난다. ‘꺾기’가 한창 성행할 때는 대출금의 70% 이상을 다시 예금하도록 한 사례가 수두룩했다. 심지어 예금이자를 고객에게 주지 않고 은행 임직원들이 골프비용이나 유흥비로 쓰는 일까지 있었다.

▷‘꺾기’가 기승을 부린 이유는 관치(官治) 금융 때문이었다. 정부는 1990년대 중반까지 기업에 싼 자금을 공급하기 위해 주요 대출금리를 직접 통제했다. 돈에 대한 수요는 많고 공급은 적다 보니 은행은 ‘꺾기’의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과도한 ‘꺾기’는 금리자율화를 계기로 점차 줄었고 자금수요가 감소한 최근에는 빠르게 사라지는 추세였다. 그런데 이달 초부터 은행의 보험상품 판매가 허용되면서 ‘신종 꺾기’가 등장했다고 한다. 일부 은행들이 대출을 받는 고객에게 특정 보험에 들도록 강요해 “울며 겨자 먹기로 보험에 가입했다”는 불만이 적지 않게 터져 나온다.

▷은행(bank)과 보험(assurance)의 융합을 뜻하는 ‘방카쉬랑스’ 시대의 개막은 금융 발전에 있어서 큰 의미를 가진다. 견고한 금융규제의 하나인 ‘금융회사간 칸막이’를 없애기 위한 첫 단추를 끼웠다고 볼 수 있다. ‘방카쉬랑스’를 맞은 고객은 한 장소에서 ‘원 스톱 금융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그에 대한 응답이 대출을 미끼로 한 보험 가입 강요라면 씁쓸하다. ‘신종 꺾기’ 관행이 확산된다면 차라리 옛날이 좋다는 말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 나아가 부정적인 여론이 비등하면 금융자율화가 후퇴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은행들은 제 발등 찍는 행위를 자제해야 한다. 감독 책임이 있는 금융당국은 엄정한 검사와 처벌을 통해 나쁜 싹이 더 자라기 전에 잘라내야 한다.

천광암 논설위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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