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쿨(Cool)’

  • 입력 2003년 9월 4일 18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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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탑방 고양이, 앞집 여자, 바람난 가족, 똥개, 보디가드 그리고 다모. 이들 인기 대중문화상품을 꿰뚫는 정서가 있다면 단연 ‘쿨(cool)’이다. 남자 여자가 만나고 헤어질 때도 울고 짜거나 매달리는 식의 끈적거리는 감정은 없다. 드라마 ‘보디가드’의 주제가는 숫제 ‘쿨하게’다. 영화 ‘똥개’에선 “내는 니가 쪼매 쿨하다고 생각했다”는 대사가 나온다. 드라마 ‘다모’ 팬들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든 사랑고백도 “아프냐. 나도 아프다”가 고작이다. 끈끈한 정과 화끈한 감정을 중시하는 나이 든 세대에겐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밍밍한 표현이지만, 젊은 세대는 열광한다. ‘쿨하다’는 걸 최상의 찬사로 치는 쿨한 세대의 감성을 쿨하게 자극하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이 시도 때도 없이 외치는 ‘쿨’은 좋다, 멋있다, 유행의 첨단이다 등을 뜻한다. 타임지 최신호는 패션 상품 TV 등에서 유행의 흐름을 빨리 알아채고 남보다 앞서 즐기는 쿨 피플을 ‘알파(alpha) 소비자’라고 소개했다. 이들의 움직임을 분석한 정보를 기업에 파는 트렌드 워처(trend watcher)가 새로운 전문직업으로 등장했다는 소식이다. 우리나라 젊은 세대에게 ‘쿨’은 최신 유행만을 뜻하지 않는다. 미리엄 웹스터 사전에 나오는 풀이, 즉 ‘어떤 경우에도 냉정함과 자기 조절능력 잃지 않기’ ‘너무 열렬하거나 친근한 모습 보이지 않기’ ‘감정의 기복 절제하기’가 이들의 정서를 잘 설명해준다.

▷‘문학동네’ ‘문학수첩’ 등 문예지 가을호에 등장한 신인작품도 이 같은 경향을 드러낸다. 한때 유행이었던, 내밀한 세계를 촉촉이 그려온 여성적 글쓰기는 슬그머니 사라졌다. 대신 감정을 배제한 채 일상사를 건조하게 서술한 쿨한 작품이 대세를 이룬다. 젊은 세대의 쿨한 일상생활이 문화에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애인과 헤어진 그들은 휴대전화 기억번지에서 전화번호를 지워버리고 나면 더 이상 기억도 못한다. 회사에선 전자결재나 메신저를 통해 싫은 사람 안 보고도 일하는 게 가능하다.

▷이처럼 ‘쿨의 시대사조’가 확산된 것은 숨가쁘게 발달하는 테크놀로지의 변화와 소유 대신 접속을 중시하는 감각적 편의적 생활양식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무게 잡지 않으면서 산뜻하게, 세련되게 등이 미덕이 된 덕분에 인간관계 역시 ‘조금만 주고 조금만 받자’ 나아가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자’로 바뀌는 추세다. 쿨하게 살다보면 상처받을 일이 없다. 어차피 죽으면 땅속에 쿨하게 묻히게 될 터. 굳이 살아생전에 얼음장 같은 심장으로 쿨하게 살 필요가 있으랴 싶지마는.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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