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안경환/지금이 베풀어야 할 때다

  • 입력 2003년 8월 26일 18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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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경북 청송군을 다녀왔다. 오래전부터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보호감호의 현장을 보기 위해서였다. 시설이야 이내 한눈에 들어오지만 그 속에서의 삶의 질은 한두 시간의 구경으로 판단할 수가 없다. 실제로 그 안에 들어가 살아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 그게 타인의 인생이 아닌가. 징역을 살고 난 뒤에 또다시 보호감호, 왜 이런 비상식적인 제도가 탄생했는지,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고 따지기에 앞서 엄연한 현실이요, 현장이다.

▼모두가 힘든 사회 칼날위에 선 기분 ▼

진심으로 자신의 죄과를 뉘우치기에 퇴소하면 남을 위해 베풀며 살겠다는 결의에 찬 맹약(盟約)도 막상 바깥 세계의 비정한 박대 앞에서는 너무나 쉽게 무너진단다. 인간의 감정 중에 증오는 암(癌)이다. 타인과 사회, 그리고 제도와 국가에 대한 증오는 끝내 자신에게로 전이되어 자신과 인간 세상 전체의 파멸을 초래하고 마는 암이다.

애써 우울을 접고 나선 월요일 아침, 인터넷을 타고 비보가 날아들었다. 캄보디아의 내 친구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이다. 모든 정황이 강도를 가장한 정치적 암살이다. 헌법이 선언한 불교국가로 사형(死刑)이 없는 대신 사형(私刑)이 판치는 나라, 그 한심한 킬링필드를 조국으로 받은 그, 그 저주받은 땅에 평화와 시민사회를 심는 데 일생을 바치겠다며 문명세계를 등지고 돌아간 지 10년, 마침내 자신의 예견과 각오대로 일생을 마쳤다.

자신이 독신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굳이 밝히지 않아도 칼날처럼 퍼렇게 선 증오의 공기에 혼자 질식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현지 언론은 ‘적이 없는 사람의 죽음’으로 보도했다고 한다. “서로 돕고 살아야 돼!” 백주에 대로에서 두 발의 총알을 맞고 숨을 거두면서 그가 남긴 말이라고 했다. 친구여, 그대는 분명 보살이 되어 부처의 세계에 합류했으리라. 생각하면 얼마나 다행인가. 적어도 우리 사회는 정치적 암살이 횡행하는 그런 단계를 넘어섰으니 말이다. 이렇게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도 일면 다른 생각이 든다. 생경한 증오나 분노보다도 더욱 무서운 것이 무관심이 아닐까. 그처럼 갈구하던 개인의 인격과 자유가 극대로 보장되는 자유사회가 왔다. 이젠 그야말로 내 멋대로 살 수 있는 자유의 천국이다. 그러나 행여 나의 자유는 이웃의 캄캄한 곤고(困苦) 위에서 춤추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각박하기 짝이 없는 세상이다. 경제가 어렵다. 신용불량자가 늘고 도산하는 기업이 줄을 잇는다. 한동안 미미하게나마 증가 추세에 있던 공익, 자선단체의 기부금이 격감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모두가 타인 탓으로, 세상 탓으로 돌린다. 제도를 피해, 사람을 피해 이 땅을 떠나고 싶다는 사람이 줄줄이 늘어난다. 실로 칼날 위에 선 기분이다.

그러나 모두가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 그리고 함께 문제를 풀어야 한다. 예년에 비하면 무더위도, 수해도 한층 가벼운 여름이 아니었던가. 한가위를 코앞에 두고도 영글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벼이삭이지만 몇 천만이 합치면 뜨거운 맨입김으로도 얼마든지 익힐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약자를 위해 흘리는 연민의 눈물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눔은 일상의 일, 베풀 때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남을 도울 형편이 되기를 기다리다간 영영 기회를 놓치기 십상이다. 아무리 가난해도 마음만 열려 있으면 널리 베풀 수 있다.

▼형편되길 기다리면 기회는 영영… ▼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남에게 베풀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가 아는 영어 중에 가장 아름다운 말은 단 두 단어 ‘수표 동봉(check enclosed)’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 두 단어를 캄보디아로 보낸다. 수신인은 순사한 친구의 이름으로 만든 ‘민주주의와 후세를 위한 기금’. 내 마음이 실려 있는 한 내용물이 부끄러울 수는 없다.

안경환 서울대 법대 학장·아름다운 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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