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상영/브루노와 갈릴레이

  • 입력 2003년 5월 20일 18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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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조르다노 브루노는 로마 교황청에 체포돼 투옥되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받아들인 그의 우주관은 전통적인 창조질서에 반하는 불온하기 짝이 없는 사상이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7년간의 감옥 생활 끝에 화형에 처해졌다.

1633년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비슷한 이유로 종교재판 법정에 섰다. 하지만 갈릴레이는 천동설이 옳다고 인정하고 목숨을 건졌다. 그가 재판정을 나오면서 했다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은 신념을 굽힌 ‘변절’을 용서받기 위한 것이었을까.

노무현 대통령이 광주 5·18기념식 연설에서 브루노와 갈릴레이를 언급했다. 일부에서 굴욕이라고 비난하는 방미외교에 대한 고뇌를 빗대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갈릴레이처럼 본심은 변하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누구나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한 브루노처럼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런 삶은 역사의 평가를 받는다. 신념과 맞바꾸는 죽음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존경심을 우러나게 한다.

하지만 선택의 주체가 국가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국가는 국민의 안전과 복리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개인의 삶과 달리 국가 경영에서는 아무리 고상한 사상이나 신념도 국익에 우선할 수 없다. 특히 국제사회에서 한 나라의 판단 기준은 오로지 국익일 뿐이다. 친미는 무엇이고 반미는 무엇인가. 미국의 입장도 국익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 지금은 반미를 외치는 논리가 내일은 친미를 뒷받침하는 논리로 변할 수도 있다.

노 대통령의 방미외교를 두고 그를 지지했던 계층이 동요하고 있다. 국민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방미외교를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한총련이 자신들의 의견을 강요하기 위해 물리력으로 도로를 막고 대통령의 행사장 출입을 저지한 것은 정상적인 의사표출이라고 할 수 없다. 여론을 악화시켜 합법화 움직임에 스스로 제동을 거는 우를 범했다.

군사독재 시절 폭력에라도 호소해야 했던 학생운동의 역사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민주적 토론이 불가능한 권위주의 정권에 살고 있는가. 5·18을 제대로 평가하겠다는 대통령에게 행사장 후문으로 입장하는 수모를 안겨줘서 얻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지지하든 안 하든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만신창이로 만드는 것은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격이다.

노 대통령은 운동권적 시각과 현실주의자의 면모를 동시에 갖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이런 면모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측도 있을 것이다. 사회운동은 신념을 전파하는 일이다. 반면 현실주의자는 이상보다는 이해당사자들의 타협점을 찾아 나선다. 국가 운영은 신념을 전파하는 일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타협을 도출하는 과정이다. 브루노의 삶처럼 전부 아니면 전무를 선택할 수는 없다.

방미외교에 대해 불만이 있더라도 의사표현은 민주적 절차에 따라야 한다. 선거에서 노 대통령을 지지했다고 해서 발언권이 더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정부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대해 불만을 가진 쪽에서 도로를 점거하고 폭력에 호소한다면 나라는 제대로 굴러갈 수 없다. 사회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며 사는 공간이다.

김상영 논설위원 you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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