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추심 현장 르포]카드 빚 전쟁

  • 입력 2003년 5월 19일 18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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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사들의 ‘빚 받기’ 전쟁을 직접 체험하러 나선 15일 오전 서울 강동구에 있는 한 신용정보회사의 지점 사무실. 이 회사는 모 대형 카드사의 악성 채권추심을 도맡고 있다. 할당받은 9명의 채무자 파일을 2시간째 넘기던 기자에게 박모 팀장(35)은 “전화로 해봐야 되지 않는다”며 직접 발로 뛰어야 될 거라고 충고했다. 1314만원을 4개월째 연체 중인 이모씨(40)의 집을 찾아 나섰다. 서울에서 막노동을 했다는 그는 경기 성남시의 허름한 다세대주택 지하에 살고 있었다. 2층에 사는 아주머니가 “절대 문을 열어줬다고 하지 말라”며 신신당부한 끝에 출입문을 열어줬다.》

어린 아들과 딸을 품에 안고 나온 부인 안모씨에게 “조금씩이라도 나눠 카드 빚을 갚으라”고 독촉했으나 안씨는 어려운 집안 사정을 구구절절 늘어놓으며 오히려 기자에게 하소연했다. 그대로 발길을 돌리려는 기자에게 2층의 아주머니는 “이씨 집이 홈쇼핑으로 물건을 어찌나 많이 사는지 동네에 소문이 났다”고 귀띔했다.

다음날 카드 빚을 받은 성공 및 실패 사례를 직원들로부터 배운 뒤 17일 이 회사의 강서구 지점에 있는 특수채권팀을 찾아갔다. 특수채권팀은 7개월 이상의 장기 연체자들을 상대로 돈을 받아내는 직원들로 구성돼 있다. 직원들로부터 1800만원의 카드 빚을 105개월째 연체하고 있는 김모씨(44·여)에 대한 정보를 얻은 뒤 김씨의 강서구 화곡동 주공아파트를 찾아갔다.

김씨는 자신의 명의로 된 재산이 없었고 아파트는 어머니, 자동차는 친정아버지 명의로 돼 있었다. 김씨의 모친은 “김씨가 가출해 인연을 끊었다”고 했지만 탐문 결과 김씨는 근처에서 어머니 명의의 다른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김씨에게는 무용 특기생인 대학생 딸도 있었다.

집에 사람이 없어 인근에 있는 여동생 명의로 돼 있는 김씨의 옷가게에 들렀다. 30대 후반의 여직원에게 “여기 있는 옷을 모두 팔면 1800만원은 되느냐”고 묻자 그 직원은 “족히 넘는다”고 말했다.

이어 카드 빚 45만원을 21개월째 안내고 버티는 S대 대학원생 이모씨(30)와 통화했다. 대학 연구소에서 일하는 이씨는 “다음달 월급을 받으면 주겠다”고 말했다. 몇 달째 같은 대답이라는 것. 이씨의 부모는 강남구 도곡동과 대치동에 아파트를 두 채나 갖고 있었다.

카드 빚을 받으려는 추심원들에 맞서 일부 채무자들은 인터넷상에 모임을 만들어 ‘채권추심 피하는 법’ ‘채권추심원 따돌리는 법’ 등의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인터넷 사이트인 D카페에만 ‘신용불량자클럽’ ‘예비신용불량자모임’ 등 유사 모임이 18일 현재 126개나 있다.

이 신용정보회사 추심원들은 1년 전 자신이 맡은 채권추심 100여건 가운데 매달 평균 15건 정도를 해결했으나 올해는 평균 5건 이하로 떨어졌다. 이들은 ‘배째라’형 채무자가 늘고, 채권 추심에 관한 규제는 강화돼 오히려 채무자에게 휘둘리는 경우가 많다고 호소했다.

강서지점 사무실의 유모 지점장(41)은 “채무자들에게 ‘법으로 해결하겠다’는 위협은 더 이상 안 통한다”며 “절차가 복잡하고 오래 걸려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는 것을 채무자들이 더 잘 안다”고 말했다.

한편 카드채권 추심원들의 지나친 행위도 문제가 되고 있다. 3년 전 개설된 D카페의 ‘신용불량자클럽’을 운영하는 남영민씨(32·회사원)는 “게시판에 뜨는 내용을 보면 신용카드, 은행, 캐피털 회사 채권 추심원들의 불법적인 행위가 꽤 심각하다”고 말했다.

일부 채권 추심원들은 반말은 예사고 부모와 직장상사 등 제3자에게 빚진 사실을 알리겠다고 협박하거나 밤 중에도 마구 전화를 걸어 괴롭히는 일이 많다는 것.

한 20대 여성은 이 사이트 게시판에 “결혼을 앞두고 추심원이 카드 빚을 진 사실을 시부모될 분들에게 알려 곤혹스럽다”고 썼다.

김성규기자 kim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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