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권순활/엄 前산은총재 '고백과 고민'

  • 입력 2003년 4월 29일 18시 33분


코멘트
28일 낮 서울 시내 한 음식점에서 엄낙용(嚴洛鎔) 전 산업은행 총재를 만났다. 그가 과거 경제관료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다른 신문사의 경제담당 중견기자 4명도 자리를 함께 했다.

식사 자리였지만 사람이 사람이고, 때가 때인 만큼 화제는 현대그룹 대북(對北)송금 사건에 집중됐다. 엄 전 총재도 비교적 상세하게 대답했다. 그는 지난해 9월 국회 증언 후 느끼고 있는 인간적 번민을 여러 차례 털어놓았다. 마음고생 때문인지 얼굴도 눈에 띄게 까칠하고 수척했다.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은 취임 후 나를 관세청장에 유임시켰고 이어 재정경제부 차관과 산은 총재까지 시켰다. 대통령 취임 초기에는 그 분의 일하는 모습을 보고 존경했다.”

“이근영(李瑾榮) 전 금융감독위원장은 재무부 시절부터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임동원(林東源) 전 국가정보원장이나 김보현(金保鉉) 전 국정원 3차장도 남북 경협업무 등으로 예전부터 교분이 있던 사이다.”

그가 공개한 내용이 ‘한때 존경했거나 잘 알던 사람들’을 결과적으로 곤경에 빠뜨린 데 대한 갈등과 고민이 담겨 있었다. 권력이 감추려 한 ‘어두운 진실’을 알아버린 데 대한 개인적 불운도 내비쳤다.

그렇지만 자신의 결정과 행동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단호히 말했다. 다시 같은 상황에 처해도 다른 선택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서해교전에서 우리 젊은이들이 죽어간 것을 보고 괴로웠다. 명색이 ‘사회 지도층’이란 사람으로 더 이상 입을 다물 수는 없었다. 지금 열병을 앓고 있지만 계속 침묵했다면 아마 암에 걸렸을 것이다.”

대북 비밀송금 공개가 경제에 악영향을 준다는 주장도 있다. 그는 “시장의 힘을 너무도 모르는 소리”라고 반박했다.

“이미 2000년에 ‘시장 사람들’을 만나면 ‘현대가 그렇게 북한에 돈을 갖다 주고도 무너지지 않으니 어디서 돈을 대주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99년만 해도 건실한 기업이었던 현대상선이 바로 다음 해에 만신창이가 된 것을 안타까워했다.

엄 전 총재에 대한 평가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대북 비밀송금은 일방적 대북지원과 정경유착, 밀실 정책결정의 문제점이 어우러진 대표적 사건이다.

이 때문에 “인간적으로 괴롭다. 하지만 계속 침묵할 수는 없었다”는 그의 말은 강한 설득력을 지닌다. ‘정권의 과욕(過慾)’에 따른 잘못된 행위를 수습하느라 고민하고 인간적 번민을 해야 하는 공직자도 이제 더 이상 안 나왔으면 좋겠다.

권순활 경제부 차장 shkwo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