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관계장애 40대

  • 입력 2003년 4월 22일 18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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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부부가 TV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남자의 외도를 그린 내용이었다. 남편이 무심코 아내에게 물었다. “당신, 나한테 여자가 생기면 어떻게 할 거야?” 아내는 0.5초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당신처럼 배 나오고, 나이 많고, 돈 없는 남자를 누가 좋아한대?” 그 말을 들은 순간 남편은 살의를 느꼈다고 했다. 지난달 ‘남자들’이라는 제목으로 공연된 모노드라마에서 정신과 의사 정혜신씨가 소개한 얘기다.

▷남성한테도 ‘폐경기 증상’이 나타난다.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믿었던 아내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새삼 분노를 터뜨리기도 하고, 유행가를 듣다 주책없이 눈물이 나서 애들 볼까봐 얼른 화장실로 숨는 일도 생긴다. 몸만 예전 같지 않아진 게 아니다. 감정이 예민해진 것이다. 나이 40을 넘기면서 남성호르몬이 줄어드는 대신 여성호르몬의 비중이 늘어난 것도 한 원인이다. ‘강한 남자 콤플렉스’ 속에서 과업지향적으로 살아온 남성들이 관계를 중시하는 여성성에 눈뜨게 되는 것도 이 시기다.

▷40대 남자의 위기가 오늘 우리나라만의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1997년 ‘중년 위기의 남자’를 쓴 심리학박사 짐 콘웨이에 따르면 산 정상에 올라서서는 “이 산이 그 산 맞나?”하는 모습이 중년남자의 자화상이다. 젊은 날 이루고 싶었던 꿈과 야망을 진정 성취했는지,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목표가 과연 이것이었는지 회의에 빠지는 때이기도 하다. 그런데 2003년 한국의 40대 남자는 이보다 심각하다. 어느 날부터인가 가족과도, 직장 동료나 후배와도 의미 있는 시간이나 속 깊은 얘기를 나누지 못하는 ‘관계장애자’가 되어버렸다. 죄가 있다면 ‘하면 된다’는 성공신화를 믿고 일만 하느라 아이들과 놀아주지 못한 것과, 갑작스러운 발탁인사 연공서열파괴 바람 탓에 나이와 경험밖에 가진 게 없는 ‘사오정’이 됐다는 것뿐인데.

▷문제해결은 문제가 있음을 깨닫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집과 일터에서의 인간관계에 장애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면 이제부터 풀어야 한다. 단, 단칼에 좋은 관계를 맺으려 들면 역효과만 생긴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말이다. 가족들에게도 “대화하자”면서 결국은 자기생각만 설교하려 들지 말고 함께 있는 시간을 늘려가며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자신의 능력을 점검하고 퇴직 이후를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다. 40대는 모두 100억원짜리 로또당첨자나 다름없다. 지금까지는 몰랐던 ‘감성’이라는 선물꾸러미를 받았기 때문이다. 또다른 나, 새로운 나와 연애에 빠지는 것도 삶의 축복이 될 수 있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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