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천광암/'토론 비용'도 적잖다

  • 입력 2003년 4월 8일 18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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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월 22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한완상(韓完相) 당시 교육부총리는 채용서류에서 학력란을 없애는 것을 뼈대로 한 ‘학벌문화 타파 추진대책’을 보고했다.

이에 대해 진념(陳稔) 당시 경제부총리와 전윤철(田允喆) 기획예산처 장관 등은 한 부총리의 보고를 강도 높게 반박해 한바탕 격론이 벌어졌다.

사안 자체가 민감하기도 하지만 ‘너무 조용하던’ 국무회의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는 점에서 한동안 화제가 됐다.

1년여가 지난 지금 노무현(盧武鉉) 정부의 국무회의 모습은 크게 달라졌다.

처음부터 결론을 이끌어낼 목표 없이 토론을 위한 토론을 하는 일이 많다. 공식회의에서는 토론만하고 결론은 장관 몇 명이 따로 만나서 내는 사례도 적지 않다. 다른 부처의 업무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는 것을 예의라고 생각하는 문화도 사라졌다.

약간 혼란스럽게 비칠 때도 있지만 국무위원들이 다양한 의견을 쏟아내고 장단점을 진지하게 논의하는 모습은 신선할 뿐 아니라 바람직하다는 반응이 많다.

그런데 정부 부처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마냥 손뼉만 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A장관은 최근 사석에서 “토론에 대한 중압감이 생각했던 것보다 크다”면서 “혹시 다른 장관이 반론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성이 떨어지는 현안에 대해서도 상대방을 ‘제압’하기에 충분할 만큼 준비를 해야 한다”고 밝혔다.

장관들이 해당 부처와 관련 없는 다른 부처 업무에 관해서도 의견을 말해야 한다는 점도 적잖은 부담이다. A장관은 “회의 준비에 종전보다 몇 배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고 토론 준비 때문에 다른 일이 뒷전으로 밀릴 때가 적지 않다”고 털어놨다.

경제부처의 한 국장은 “토론 준비에 밀려 시급한 현안을 놓고 장관과 논의할 시간이 충분치 않다”고 말했다. 실무자로서는 장관이 대통령 앞에서 답변을 못해 망신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 일이 최우선시될 수밖에 없다는 것.

일부 부처에서는 “우리 장관은 토론을 잘하지 못하는데 논리 부족 때문에 정책이 뒤집어지지 않을까…”라는 걱정도 나온다. 그래서인지 토론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현안을 놓고 모의토론을 하는 부처까지 있다.

토론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토론을 위한 토론’ 때문에 시급한 현안 처리가 뒷전으로 밀리는 것은 곤란하다. 더구나 대부분의 경제지표가 곤두박질치고 있는 지금은 ‘말의 성찬(盛饌)’에만 빠져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다. 토론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방법도 진지하게 생각해볼 때가 아닐까.

천광암 경제부기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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