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눈]이오키베 마코토/韓-日, 아이들은 벌써 친구

  • 입력 2003년 3월 26일 19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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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일관계가 전공인 탓에 한국과의 인연은 그리 깊지 않지만 한국을 생각하면 세 가지 풍경이 떠오른다.

첫 번째는 6, 7세 때 기억이다. 1950년 6·25전쟁이 났을 때 세살 위 형에게서 한국의 학도병에 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일본도 전후 혼란기였던 당시 집 근처 강가에 재일 한국인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한국인 아주머니가 길을 가는데 동네 개구쟁이들이 뒤에서 욕설을 해댔다. 그 여인은 아무 말도 듣지 않은 듯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과거 반성하는 일본인 많아 ▼

그때 필자는 왜 한국인이 일본에서 사는지, 왜 그런 취급을 받는지 이해가 안 갔다. 후에 역사를 배우고서 배경을 알게 된 다음엔 어렸을 때 그때 그 정경이 늘 눈앞에 어른거렸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것은 분명 나쁜 짓이다. 식민지 역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본에서 살게 된 한국인에게 사과의 마음을 전하는 게 마땅하거늘 오히려 괴롭히는 것이 일본인이란 말인가. 일본인 중에는 한국인의 반일 감정이 집요하다며 넌더리를 치는 이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일본 쪽 자세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일본이 반성하지 않으면 우리 세대가 살아있는 동안 한일 양국이 친구가 되는 것을 바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69년 히로시마 대학에서 조교수로 일할 때다. 식민지 시대 조선에서 교편을 잡았던 오쿠다 아키오(奧田秋夫)라는 선배 교수 부부에게서 현지 생활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당시 집안일을 돕던 조선 여인이 무언가를 훔치는 것을 보고 선배 부인이 꾸짖자 이 여인은 “내가 물건을 훔친 것은 잘못이지만 일본인은 우리나라를 훔쳤다”고 반박했다는 것. 그 말에 선배 부인은 얼굴이 화끈거렸다고 했다.

그 선배가 근무한 고등전문학교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함께 수업을 받았는데 한번은 조선학생이 1등을 차지했다. 그러자 일본인 선생들은 “1등에는 일본 학생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배는 “엄정하게 실시한 시험의 결과를 뒤집는 것은 옳지 않다. ‘1등은 일본인으로 제한한다’는 학칙을 만들지 않는 한 멋대로 바꿔서는 안 된다”며 반대했다.

그 즈음 한 총명한 조선 학생이 군대 소집명령을 받았다. 그 선배는 그에게 편지를 썼다. “자네는 조선 사람이지 일본인이 아니다. 따라서 이 전쟁에서 죽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살아남아 전쟁 후 조국 건설에 공헌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학생은 광복 후 한국 건설에 참여해 외교관이 됐다. 이 학생은 훗날 그 선배를 찾아와 “전쟁 중 늘 선생님 편지를 가슴에 품고 힘들 때마다 꺼내 몇 번이고 읽었다”고 털어놓았다.

일제는 문화 수준이 높고 자존심이 강한 조선인들에게 해서는 안될 짓을 했다. 이때의 상처는 너무 깊어서 당분간 치유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제국주의 시대에도 그 선배와 같은 일본인이 있었다는 것은 작지만 한 가닥 희망이다.

세 번째는 얼마 전 얘기다.

필자는 지난해 한일월드컵 축구대회를 미국에서 TV로 봤다. 한일 양국 선수들의 활약상이 전해질 때마다 재미 한국인들과 축하인사를 주고받았다. 한 일본 친구는 한국이 첫 경기에서 이기는 장면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 얘기에 나도 감동했다.

과거 한일 양국민은 상대방의 좋은 일은 애써 외면하고 불행은 안타까워하기보다는 당연하다는 분위기였다. 지금은 한국팀 승리에 일본인이 눈물을 흘릴 정도로 공감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어둡지만은 않은 양국관계▼

필자의 열네살짜리 딸은 작년 여름방학 때 미국의 한 영어캠프에 참가해 한국인 학생들과 함께 합숙 생활을 했다. 한 한국인 학생은 “할머니가 일본인은 나쁜 사람이니까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했다”며 내 딸을 피했다. 하지만 나머지 4명의 한국 학생은 “쓸데없는 소리”라며 서로 거리낌없이 어울렸다. 미국 학교에 재학 중인 딸은 지금 미국 학생보다 한국 학생과 더 친하게 지낸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아직도 복잡한 문제가 적지 않다. 특히 한국 쪽에는 일본에 대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세대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아무리 애써도 두 나라가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미리 단정지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넓은 시야로 보면 양국 관계가 매우 빠른 속도로, 그것도 좋은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은 틀림없기 때문이다.

이오키베 마코토 고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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