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역사서설'…15세기 아랍천재 '학문의 틀'만들다

  • 입력 2003년 3월 14일 19시 12분


코멘트
◇역사서설/이븐 할둔 지음 김호동 옮김/575쪽 2만5000원 까치

사서설이븐 할둔은 중세의 이슬람 세계가 낳은 최고의 석학이다. 그의 ‘역사서설’은 역사철학에 대한 기념비적인 걸작으로 오늘날까지 동서양의 많은 학자들로부터 아낌없는 찬사를 받고 있는 고전 중의 고전이다.

저자는 자신이 정통해 있던 이슬람 문명사를 기초로 하여 모두 3부로 되어있는 세계사, ‘이바르의 책(성찰의 책)’을 썼는데 이 ‘역사서설’은 이 책의 서론 부분과 문명과 사회의 본질과 특징을 다룬 제1부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역사서설’이 독립된 책으로 나와 세계 지성인들의 필독서가 된 까닭은 이 책이 갖고 있는 학술사적 가치와 중요성 때문일 것이다.

책은 모두 6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사회 구성 및 문명의 조건과 전제들, 문명의 유형과 전이, 왕조·왕권·정부론, 도시의 형성과 발전, 경제적 이윤과 기술, 학문분야와 교육론 등으로 역사학의 범주를 넘어 정치학 사회학 경제학 신학 교육학 문화인류학 등 오늘날 독자적 학문 분야로 분류되고 있는 여러 학문들을 포괄하고 있으며, 마치 인간 문명의 한 대전(大全)과도 같이 방대한 주제들을 담고 있다.

무엇보다 현대 석학들이 이 책을 경이로워하는 큰 이유는 19세기 이후 서구의 학문 세계가 새롭게 발견하고 정립해 간 이러한 여러 학문 분야의 이론들에 대해 이미 15세기에 이 위대한 이슬람 학자가 그 골격을 짜고 논의했다는 점이다. 저자의 탁월한 선견, 심원한 통찰력, 이론과 사상의 현재성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그 때문에 저자에게는 ‘사회학의 아버지’ ‘중세 역사 철학의 지성’ 따위의 수사적 경칭들이 붙고, 그는 홉스, 마키아벨리, 몽테스키외, 루소, 콩트, 뒤르캥, 애덤 스미스, 마르크스와 같은 저명한 서구 근대학자들에 앞선 선구자로서 평가받고 있으며, 그와 이들간 이론의 유사성이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계속 비교 연구되고 있다.

이븐 할둔은 인간에게 사회는 필수적이라고 말하고 한 집단이 갖는 결속력을 ‘아싸비야(집단 연대 의식)’라고 불렀다. 그리고 한 국가의 흥망성쇠가 바로 이 연대의식의 작용과 강한 정도에 달려 있다고 분석하였다. 그리고 나서 왕조와 문명의 성쇠에 대한 그의 유명한 이론을 전개한다. 왕조와 문명도 인간처럼 자연적인 수명을 갖고 있으며 창건, 번영과 전성기 도달, 쇠퇴, 몰락이라는 단계를 거치면서 역사순환의 곡선을 그려 간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당시 서구 이슬람 세계에서 흥망을 거듭했던 여러 왕조들에 대한 저자의 깊은 성찰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후 국가와 문명의 출몰에 대한 설득력 있는 이론이 되었다.

이 책이 가진 또 하나의 장점은 이슬람 교리와 역사에 관한 깊이있는 지식을 얻게 한다는 것이다. 칼리파제와 이맘제, 쉬아파 교리, 이슬람 도시와 건축, 코란과 전승, 이슬람법, 사변신학, 수피즘 등 이슬람학의 주요 주제들에 대한 매우 유용한 지식을 제공해 주고 있다.

특히 국가권력과 종교에 관한 논의는 괄목할 만하다. 그의 이슬람 정치론도 독특하고 체계적이다. 정치 유형을 인간 지성에 의한 권력 국가 형태의 이성 정치와 신의 계시에 의거한 신권정치 형태의 종교정치로 나누어 분석하였고, 특히 그가 전개한 샤리아 정치론은 이집트의 무함마드 압두, 파키스탄의 무함마드 이크발 같은 근대 이슬람 개혁 사상가들에 의해 현대 이슬람 국가들이 따라야 할 합리적인 정통이론으로 받아들여졌다.

역자의 노고에도 경의를 표할 만하다. 무엇보다 세련된 문체와 쉬운 글맛의 깔끔한 번역이 돋보인다. 난해한 이슬람학 관련 아랍어 전문용어에 매우 적절한 국역을 시도했고 아직 국내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이슬람 종교나 역사에 관련된 고유명사와 어휘들에도 세심하고 유익한 주석을 달아 놓았다.

20세기의 역사가 토인비는 그의 ‘역사연구’에서 이븐 할둔과 그의 책을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그는 완벽한 지력, 넓고 심오한 시각으로 위대한 작품을 단숨에 써낸 아랍의 천재이다. 그가 쓴 ‘역사서설’에서 그는 지금까지 어느 곳, 어느 때, 어느 누구도 일궈내지 못한 독창적인 역사철학을 착상해 내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서술하였다.”

‘역사서설’은 해마다 인류에게 영향을 준 세계 고전 시리즈를 발표할 때마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책이다.

거시적 시각으로 역사와 문명을 새롭게 고찰하고자 하는 독자나 이슬람학에 관심을 가진 연구자에게 특히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이슬람 역사와 문화가 강의되는 세계의 유수대학들에서는 으레 이 책이 교과서로 채택되어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책의 번역 출간을 계기로 널리 활용되었으면 한다.

손주영 한국외국어대 교수(아랍어)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