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박영균/국세청장

  • 입력 2003년 3월 3일 18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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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어느 국세청장은 책상을 청와대를 향해 배치하도록 했다. 자리에 앉으면 청와대 쪽을 바라볼 수 있게 한 것이다. 국세청장은 오로지 대통령의 지시를 받는다는 자세로 일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 한다. 국세청은 정부 직제상으로는 재무부 산하기관이지만 실제로 과거에 국세청장이 재무부장관의 지시를 따른 적은 거의 없었던 모양이다. 재무부를 ‘국세부 재무청’이라고 격하시키는 말까지 생겼을 정도이니 충분히 짐작이 간다.

▷국세청장에는 대통령의 의중을 헤아릴 수 있는 측근 인물이 임명되는 게 관례였다. 3공화국 시절에는 주로 박정희 전 대통령과 같은 군(軍) 출신이 국세청장을 맡았다. 1966년 재무부의 한 부서에서 국세청으로 독립한 이후 이른바 군 출신인 ‘혁명주체’들이 청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5공 초기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육사 후배들이 국세청장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6공 이후에 비로소 국세청 출신 관료들이 청장에 임명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태우 전 대통령과 동향인 TK(대구 경북) 출신이 대부분이었고 김영삼 전 대통령 때에는 PK(부산 경남) 출신이 많았다. 언론사 세무조사를 주도했으나 지금은 해외도피 중인 안정남 전청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동향이었다.

▷대통령과 가까운 측근 실세들이 국세청장에 등용되어 아마도 국세청의 힘이 세지고 정부 내에서 위상도 높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국세청이 권력에 의해 타락한 것이나 다름없다. 세무조사 세무사찰 등 무소불위의 국세청 권한이 권력자의 정치적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다면 그것이 바로 타락이 아닌가. 권력이 바뀌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정치적 경쟁자에 대한 ‘표적 세무조사’였다. 과거 현대그룹이나 포항제철에 대한 특별세무조사가 대표적인 사례다. 언론에 침묵을 강요하기 위해 벌이는 세무조사도 예외는 아니다.

▷비뚤어진 국세청의 모습이 노무현 정부의 등장과 함께 어떻게 바뀔 것인지 관심을 끈다. 노 대통령이 “옛날에는 정권을 위해 미운 사람을 조사하고 선택적으로 권한을 행사해 막강했지만 이제는 고달프고 별 볼 일 없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새 국세청장에는 대통령과 친하지도 않고, 출신지역도 다른 인물이 내정됐다. 국세청이 본래의 역할을 하려면 대통령도 국세청을 이용하지 말아야 하고, 국세청장도 부당한 권력의 요구에 저항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미국에서도 권력의 무리한 요구가 있었지만 국세청장들이 대부분 압력에 굴하지 않았다고 한다. 국세청의 환골탈태를 기대해 본다.

박영균 논설위원 parky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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