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임규진/‘경기침체’ 언론보도 탓?

  • 입력 2003년 2월 9일 19시 07분


코멘트
1997년 10월 기자는 재정경제원(현 재정경제부)을 출입하고 있었다. 한보와 기아그룹 사태로 한국경제의 신용도가 끝없이 추락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정부 당국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어 경제위기 우려가 크다’는 기사가 나올 때마다 공무원들은 “어두운 기사를 쓰면 한국경제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한국경제는 그해 11월 말 국제통화기금(IMF)의 관리체제로 넘어갔다. 기자는 외환위기를 사전에 충분히 경고하지 못했다는 자성(自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김영삼(金泳三) 당시 대통령도 11월 들어서야 경제가 어려운지 알았다고 나중에 증언했다. 대통령 주변의 수많은 경제관료와 전문가들은 막판까지 대통령 귀에 듣기 좋은 말만 계속했던 것이다.

노무현(盧武鉉) 당선자는 8일 인수위 간사단 회의에 참석, “어두운 경기를 거론하면서 위기를 확산시키는 언론 보도들이 있다”며 “이는 경기상승을 지체시키고 경기하강을 촉진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노 당선자의 우려를 이해 못하는 바 아니지만 그의 발언은 97년 경제부처 공무원들의 얘기와 비슷하게 들린다.

우선 박승(朴昇) 한국은행 총재는 이례적으로 올해 성장률 전망치가 당초 5.7%에서 5.5%로 떨어질 수 있다고 밝혔다. 7일 국제유가는 35달러까지 치솟고 국내 종합주가지수는 1년3개월 만에 최저치를 보였다. 코스닥지수는 사상 최저치에 근접했다. 각종 기관이 조사한 기업인들의 투자심리도 어둡기 그지없다. 이 같은 어두운 기사는 모두 시장의 구체적 통계에서 나오고 있다.

노 당선자 얘기대로라면 언론은 이런 지표를 모르는 체 하고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소비와 투자심리를 살리고 경제가 좋아지게 하는 방법일까.

보도를 탓하는 것이 지금 노 당선자가 할 일은 아니다. 기업인들이 어두운 전망의 최대 이유로 꼽은 ‘경제 불안감’을 조속히 해소하는 일이 우선적 과제다. 아울러 대북 비밀송금 사건에서 드러난 정경유착과 관치금융의 악습을 뿌리뽑아야 한다. 본말이 전도되는 일을 되풀이하다가는 문제해결의 타이밍만 잃게 될 것이다.

임규진 경제부 mhjh22@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