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기홍/낭만, 현실, 그리고 허무

  • 입력 2002년 12월 22일 17시 49분


19세기는 활발한 문예사조의 시기였다. ‘오르낭의 매장(埋葬)’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는 “천사를 본 일이 있는가. 그대 아버지를 보고 그려라”라고 가르쳤다. 천사라는 공상적 존재를 상상하는 것은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는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 낭만주의는 당시의 고전주의를 비판하면서 인간성의 진실을 찾기를 촉구했다. 그 결과 자아의 확인과 개인의 창조적 가능성이 강조되었다. 흔히 말하는 ‘내공’이 그것이다. 19세기에는 절대적인 진리나 도덕,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허무주의도 있었다. 이런 사상은 도스토예프스키를 거쳐 20세기 초에 급속히 퍼졌다.

▷이 같은 낭만, 현실, 그리고 허무는 지인들과 환담을 나눌 때 조금 재미있게 변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 한 사람 몫을 하기를 원하는가. 그러면 사실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눈앞에 닥친 현실을 냉정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회에서 ‘더 크고 아름다운’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낭만주의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창조적 상상력으로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보고, 현재의 문제점을 거꾸로도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주의자를 거쳐 낭만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몽상가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쨌건 내공을 쌓을 필요가 있다. 허무주의자는 내공의 크기가 작아 현실에서 도피한다. 자기 마음의 크기가 도저히 현실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될 대로 돼라’는 말을 즐겨 쓴다.

▷지난해 10월 미국 프로야구에서는 배리 본즈가 73개라는 한 시즌 최다 홈런을 기록했다. 그런데 그 73번째 홈런볼을 두고 관중 사이에 서로 자기 것이라는 다툼이 일어났다. 외야석에 떨어진 홈런볼을 앨릭스 포포브가 먼저 잡았으나 관중에 떠밀려 놓쳤는데 패트릭 하야시가 다시 잡았던 것이다. 사실주의자가 이 다툼을 판단한다면 이 홈런볼은 포포브 아니면 하야시의 것이다. 하나의 물건에 대한 소유권은 ‘현실적으로’ 한 사람에게만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샌프란시스코 대법원의 매카시 판사는 일단 공동 소유로 하면서도 사실상 개별 소유권을 인정하는 이색 판결을 내렸다. “홈런볼을 판매한 뒤 서로 나누라.” 이런 판단을 내리는 것을 보니 그는 아마도 낭만주의자인 것 같다. 사물을 다르게 보는 상상력이 있으니 말이다. 그럼 허무주의자는? 십중팔구는 이렇게 말할 게다. ‘그 홈런공, 박찬호가 던진 것 아냐? 그러니 판단 보류다.’

김기홍 객원논설위원 산업연구원 연구위원 gkim@kiet.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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