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포커스]'학벌없는 사회 운동' 김동훈 교수

  • 입력 2002년 12월 3일 17시 45분


“학벌은 신종 카스트제도”라고 규정한 김동훈 교수는 그런 폐단을 자신의 어린 아이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학벌 없는 사회’를 만드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 권주훈기자
“학벌은 신종 카스트제도”라고 규정한 김동훈 교수는 그런 폐단을 자신의 어린 아이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학벌 없는 사회’를 만드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 권주훈기자
《대선 레이스가 한창이지만 지금 전국의 고등학교와 가정에서는 그 못잖은 또 다른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수능시험은 끝났지만 대학 입시의 ‘본 게임’은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수능 성적이 나쁜 걸 비관해 자살했다’는 뉴스도 연례행사처럼 올해도 빠지지 않았다. 대통령임기는 5년이지만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는 평생을 따라다니는 ‘신분증’이 되고 있으니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는 수험생들, 또 그 학부모들 심정은 대선 후보들보다 더 절박한 것일 수 있다.》

김동훈(金東勳·43) 국민대 법대교수는 “학벌이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는 현실이 신종 신분제 사회를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김 교수는 ‘학벌 없는 사회 만들기’라는 단체를 만들어 줄기차게 이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고 있는 이다. 최근엔 ‘서울대가 없어야 나라가 산다’는 다소 ‘과격한’ 제목의 책을 내 그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학벌은 한국적 카스트 제도

-평소 학회모임 같은 자리에서 서울대 교수들도 자주 만날 텐데, 이 책 때문에 불편한 시선을 느끼진 않습니까.

“글쎄요, 조금 어색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제가 얘기하려고 했던 건 ‘서울대’라는 특정한 학교를 겨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화된 서울대, 즉 서울대로 상징되는 피라미드형 학벌 시스템에 대한 문제 제기였습니다.”

그가 보기엔 서울대는 기형적인 학벌제의 핵심이자 정점이다.

“언젠가 인터넷 문고에서 ‘서울대’라는 단어를 검색했더니 서울대가 제목에 들어간 책이 50∼60권 나오더군요. 그런데 대부분 ‘서울대를 꿈꾸는 중학생이 알아야 할 57가지’ ‘삼수 사수를 해서라도 서울대에 가라’는 제목들이에요.”

김 교수는 “서울대가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주술적 힘을 가진 상징으로 숭배되고 있다는 한 단면”이라고 단언한다.

‘서울대가 없어야…’라는 책의 제목은 도발적이다. 하지만 김 교수의 주장이 단발성이지 않은 것은 이 책이 그가 지난 몇 년간 꾸준히 해왔던 일련의 문제 제기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이번 책은 3년 전 ‘대학이 망해야 나라가 산다’를 시작으로 ‘한국의 학벌 또 하나의 카스트인가’에 이은 일종의 연작(連作)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그는 학벌을 ‘한국적 카스트’ 제도로 규정한 건 학벌이 혈연이나 지연보다 더 무서운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혈연 지연은 서서히 약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학연은 그 반작용으로 오히려 심해지고 있어요. 군벌의 시대는 가고 재벌의 기세도 한풀 꺾였는데 학벌의 위세는 더 극성스러워지고 있다고 할까요.”

-자발적으로 대학 진학 대신 제3의 길을 선택하는 청소년들도 늘고 있고, 그 밖에 학벌제를 깨려는 시도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학벌제가 ‘심해지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고시제도를 예로 들어보죠. 예전에 고시는 패자부활전의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적잖은 비명문대생들이 고시 합격을 통해 학벌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점에서 학벌의 완충기제 역할을 했죠. 하지만 고시 합격자가 늘면서 요즘엔 서울대 법대 출신만을 채용하는 것을 불문율로 하는 로펌이 있을 정도로 오히려 학벌 결속력이 더 단단해지고 있어요.”

그의 말처럼 얼마전 한 대기업도 몇몇 명문대 출신들만을 상대로 비공개 채용한 사실이 알려져 물의를 빚은 적도 있다.

“학벌제가 이젠 좀더 세련된 방식으로, 그리고 제도적으로 점점 강력하게 재생산되고 있는 양상입니다.”

●고착화된 대학 서열을 깨야

기자는 그를 만나기 전 그의 책 표지에서 그의 이력을 꼼꼼히 뜯어봤다. 하지만 ‘학벌 철폐 운동가’답게 학력은 전혀 나와 있지 않아 다른 경로로 알아봤다. 그는 서울대 법과대학원을 졸업한 ‘범 서울대 동문’이지만 학부는 다른 대학을 나와 흔히 말하는 ‘진짜’ 서울대 출신은 아니다. 기자의 ‘졸렬한’ 의문이지만 혹시 반 서울대 주장이 자신의 그런 이력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다른 자리에서도 그런 얘기를 종종 듣습니다. 굳이 이렇다 저렇다 설명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중요한 건 누구의 말이든 그 주장이 합리적이고 근거가 있는 것인가를 중심으로 봐야지, ‘누가’ 그 문제를 제기하느냐는 걸 먼저 따지려고 하는 것은 본말이 바뀐 것이죠.”

따지고 보면 명문대 출신은 아니지만 화려한 그의 이력은 ‘콤플렉스’ 운운하는 게 난센스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대학 재학 중 외무고시 최연소 합격, 독일 쾰른대에 유학하고 돌아와 30세부터 대학 교수로 재직 중.

“유학 중 보고 겪은 독일의 평준화된 대학 시스템과 우리 사회가 비교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몸담고 있는 대학이 이른바 명문대가 아닌 탓에 한국사회에서 비명문대 학생들이 감내해야 하는 설움을 옆에서 많이 봤기 때문입니다.”

-‘학벌 없는 사회 만들기’ 활동에 대한 일반인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대부분 취지에는 공감한다고 하죠. 하지만 문제는 의식과 행동의 불일치 같아요. 얼마 전 심각한 토론회의 뒤풀이 시간에 이른바 생각이 열렸다는 인사와 첫 인사를 나눴는데 첫 질문이 ‘어느 학교 나오셨냐’는 거예요.”

그 정도로 학벌주의가 우리의 의식과 문화의 심층에 정서적으로 강력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 문제의 뿌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학벌 때문에 빚어지는 폐해를 정서적으로 거부하는 의식의 전환이 없으면 학벌주의의 극복은 어렵다고 그는 본다.

그는 학벌문화를 이루는 큰 기둥으로 ‘동문회’ 문화를 든다.

“봉건제 유물인 신분의식과 문벌의식이 요즘엔 동문회를 통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학벌타파 운동을 하는 어느 학부모가 특목고에 다니는 딸의 졸업식에 갔다가 ‘출세한 선배들이 사회에서 동문을 기다리고 있다’는 선배들의 영상 축하메시지를 틀어주는 것을 보고 씁쓸했다고 하더군요.”

▼자녀가 서울대 가겠다면?▼

언론 보도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매년 대학 시험철이면 각종 매체에서 서울대 합격생이 인격과 인생의 성공자인 것처럼 보도합니다. ‘일류대병’이라는 사회적인 편집증을 대중매체가 앞서서 심어주고 있는 셈이죠.”

-하지만 학벌제가 그렇게 견고하다면 그 폐해가 하루아침에 없어지기를 기대할 수도 없는데 어떤 대안이 있습니까.

“일류대 때문에 문제가 생겼으니 그걸 없애자는 발상은 순진한 생각입니다. 오히려 다수의 대학이 진정한 일류가 되기 위해 경쟁할 수 있는 공정한 조건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죠.”

그는 서열 자체보다는 서울대를 정점으로 서열이 고착화되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는 대학 재량권 강화 등 몇 가지 방안을 얘기하면서도 “솔직히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연구가 필요한 단계”라고 말한다. 학벌제 철폐운동 사이에서도 해법을 놓고 입장 차가 나타나고 있다. 문제의식의 총론에서는 일치하지만 현실과 만나는 각론에서는 다양한 갈래로 분화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문(愚問)을 던져봤다.

-만약 아이가 자라 서울대를 가야겠다고 한다면 말리겠습니까.

“좋은 대학 보내려는 부모 마음을 이기주의로 몰아붙일 수 없듯이 개인적인 차원으로 봐서는 안됩니다. 다만 제 어린아이에게 이런 현실을 물려줘선 안되겠다는 생각입니다.”

돌아온 현답(賢答)에서 그의 이상이 이겨내야 할 현실의 크기가 가늠됐다.

▼인터넷에 뜬 경험담▼

김동훈 교수가 이끄는 ‘학벌 없는 사회 만들기’(goodbyehakbul.org)나 ‘학벌 없는 사회’(antihakbul.org) 홈페이지에는 학벌제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경험담들이 올라와 있다.

이들의 얘기를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뿌리깊은 학벌제의 단면을 엿볼 수는 있다.

‘씁쓸이’라는 필명의 한 지방대 졸업생은 씁쓸한 취직 실패담을 전한다.

“지방의 모대학을 나와 취직준비를 하는데 1차시험(서류전형)만 100여군데 떨어졌다. 그런데 웬일인지 모카드회사에 서류전형도 붙고 드디어(!) 면접을 보러 갔다. 그런데 그 회사 입사서류에는 무슨 캠퍼스인지를 쓰는 난이 없었다. 이런 회사도 있구나, 감격해 하면서 평소에 갈고 닦은 영어 중국어 실력을 뽐내며 나름대로 면접도 잘 봤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후 그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씨죠?’ ‘네, 그런데요’ ‘××회산데 무슨 캠퍼스 나오셨어요?’ 사실대로 대답한 후 다시는 연락이 없었다. 이 씁쓸한 기분을 뭐라 설명해야 할지.”

‘Geist’라고 밝힌 필자는 대입 때문에 자살한 학생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불감증을 지적했다.

“올해 수능 끝나고 벌써 두 명의 어린 학생이 추운 가을날 쓸쓸한 넋이 돼 사라졌다. 사람들은 미군의 장갑차가 여중생을 두 명 죽였다며 소리치고 있지만 교육문제 때문에 사람이 죽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듯 쳐다본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감각하게, 너무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그런가 하면 경기 안성시의 한 고교생은 ‘서울대 안 가기 운동’(antisky.su.st)을 인터넷상에서 벌이고 있다.

▼김동훈 교수는…▼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80년 A대(학벌 없애기 운동 취지 따라 밝 히지 않음) 법대 재학 중 외무고시 최연소 합격하고

△1년간 외무부 근무하다 대학원을 거쳐

△88년 독일 쾰른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89년∼현재 국민대 법대 교수이며

△2000년 ‘학벌 없는 사회를 위한 모임’, 2001년 ‘학벌 없는 사회 만들기’ 결성

이명재기자 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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