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우룡/´도청과 세무조사´ 의 두 칼

  • 입력 2002년 11월 29일 18시 18분


국가정보원이 광범위한 전화 도청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큰 충격을 주고 있다. 한나라당이 28일 폭로한 27쪽짜리 문건에 의하면 국정원은 정치인과 언론사 사장, 그리고 기자들의 전화통화 내용을 무차별적으로 불법 도청해 왔다는 것이다. 도청내용은 보고서로 만들어져 상부에 전달되었고 소위 ‘정치공작’에 이용되었다고 야당은 주장하고 있다.

▼´불가침´언론자유 무너졌다▼

이 도청자료 폭로를 둘러싸고 여야가 정반대의 주장을 펴고 있어서 흥미롭다. 도청대상이 된 민주당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지만, 한나라당 관계자들은 통화 사실을 모두 시인하고 있다. 도청당한 대부분의 기자들은 자신들의 대화 내용을 사실로 확인해 주고 있다. 반면 도청 당사자인 국정원은 보도자료를 통해 “이 문건은 ‘괴문서’로서, 국정원은 불법도청은 일절 하고 있지 않으며 정치공작이나 정치개입도 하고 있지 않다”고 반박했다.

국정원은 도청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그런 일 없다”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거듭 주장해왔다. 대선을 앞둔 시점에 도청이 정치문제로 비화하자, 민주당 조순형 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은 “한나라당의 주장이 사실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적극적으로 밝혀야 한다”고 진화에 나섰다.

불법도청이 사실이라면 정권이 바뀌어도 몇 번은 바뀔 만한 대사건이다. 저 유명한 워터게이트 사건을 보라. 그 작은 도청과 그것을 은닉하려 한 시도가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사임하게 만들지 않았던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통신의 비밀은 가히 ‘불가침’이라 할 만하다. 우리나라 통신비밀보호법은 우편물의 검열 또는 전기통신의 감청을 하거나 공개되지 아니한 타인간의 대화를 녹음 또는 청취하지 못하도록 못박고 있다. 도청은 법률용어로는 ‘감청’이라고 하는데, ‘전기통신에 대하여 당사자의 동의 없이 전자장치·기계장치 등을 사용해 통신의 음향·문언·부호·영상을 청취하거나 공독하여 그 내용을 지득 또는 해득하거나 전기통신의 송수신을 방해하는 일’을 말한다.

법은 엄격한 요건 하에 예외적으로 정보기관의 감청을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국정원 도청의혹 문건에는 신문사와 방송사 사장, 정치부 기자들의 대화를 몰래 엿들은 내용까지 들어 있어 자유로운 언론활동을 크게 위축시키고 있다. 언론계 인사에 대한 불법도청은 반인권적 범죄행위이자 언론을 탄압하고 자유언론을 억압하려는 폭거라고 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는 감시사회 속에서 어떻게 자유로운 정보의 유통과 날카로운 비판의 소리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제 정보정치, 공작정치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야 한다. 권력의 부패, 부정, 비리, 부조리는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할 때 더욱 심해진다. 17세기 영국의 사상가 존 밀턴은 진리의 발견을 위해 표현의 자유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리와 거짓이 공개적으로 논쟁을 하게 되면 진리가 승리하게 되므로, 진리와 거짓의 논쟁이 거짓을 억제하는 확실한 방법이라고 설파했다. 언론계 인사들에 대한 불법도청은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자유언론을 통제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얼마 전 국제언론인협회(IPI)는 우리나라를 언론감시 대상국으로 지목했다. 언론의 자유가 위협받고 있는 ‘요주의 국가’라는 뜻이다.

▼민주주의 뿌리 흔드는 정부▼

김대중 정부의 언론정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세무조사’와 ‘언론도청’이라고 하는 쌍칼로 상징된다.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 국민은 웬만해선 놀라지 않는다. 해괴한 일련의 일들이 하도 많이 터져서 중독된 탓이 아닌가 싶다.

“나에게 어떤 자유보다도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알고 말하고 주장할 수 있는 자유를 달라.” 밀턴이 이렇게 언론의 자유, 통신의 자유를 노래한 지 350년이 넘었다. 정부는 역사의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서 노벨평화상 수상의 명예를 더 이상 훼손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김우룡 한국외국어대 정책과학대학원장·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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