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천황을 알아야 일본이 보인다'

  • 입력 2002년 11월 22일 17시 22분


◇ 천황을 알아야 일본이 보인다/ 가리야 데쓰 지음 슈가 사토 /그림 김원식 옮김/ 288쪽 8900원 세계인

“영국도 왕가가 있지 않아? 일본도 왕가가 있을 수 있지 뭘….”

일제강점지 통치를 경험한 세대가 줄어가는 오늘, 우리에게 이웃나라의 ‘천황’이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그렇고 그런’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헌법에 ‘국가의 통합을 상징’하는 존재로 명시된 천황의 존재는 당사국인 일본 지식인에게 훨씬 민감한 사안이다.

만화로 엮은 이 책은 천황이 역사상 어떤 경로를 거쳐 신격화됐으며, 어떻게 국민의 정신세계 속에 독소로 작용해 왔는지를 낱낱이 해부한다.

주인공 스미카와 진은 도토대 축구부 주장. 선배들의 전횡이 판치던 축구부를 장악하고 의사결정을 민주화해 전일본대학축구대회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끈다. 그러나 결승전 개회식 때 히노마루(일장기)를 쳐다보지 않고 기미가요(일본 국가)도 부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축구부에서 제명되고 만다. 천황제의 광기를 몸소 체험한 이 대학 이사장 슈조씨만이 그를 두둔하지만, 축구부 선배들을 비롯한 국수파는 이사장마저 축출하려고 집단행동에 나서는데….

저자는 먼저 일본인이 잘 모르거나 애써 외면하는 천황의 ‘역사적 진실’에 칼을 들이댄다. ‘만세일계(萬歲一系)’라는 천황가의 신화도 피의 살육으로 점철된 역사를 분칠한 왜곡의 결과에 지나지 않으며, 근대까지만 해도 일본인 대부분은 천황의 존재에 대해 무심하거나 아예 모르고 있었다는 설명. 막부를 폐지하고 자신들이 권력의 중심을 장악하려는 일부 정치가의 ‘정권욕’이 오늘날 천황의 신격화를 낳았다는 사실도 제시한다.

패전과 함께 천황제의 독소가 제거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제도로서의 천황은 아직도 일본인의 정신구조에 거대한 압력으로 작용한다. 저자는 ‘한 사람의 권위를 상정하고 그를 신격화한 뒤 절대적으로 명령에 따르는’ 일본식 조직문화가 천황제에서 비롯되었으며, 천황제를 깨지 않고서는 이런 집단문화와 그 부작용을 타파할 수 없다고 역설한다.

책을 읽은 뒤 문득 찜찜한 느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일본이 물러간 뒤 57년이 지나서도 무조건 상명하복의 조직문화는 왜 우리에게서 청산되지 않았을까. 천황제가 남긴 독소는 한반도 반쪽을 지배하는 ‘수령론’으로도 좀비(Zombi·돌아다니는 송장)화된 것은 아닐까…. 결국 이 책은 어느 정도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중-일전쟁 중인 1941년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난 원저자 가리야씨는 일본인의 전쟁범죄를 현지 취재한 논픽션 ‘일본인의 긍지’ 등 문제작을 통해 일본 지식계에 깊은 반향을 불러일으켜 왔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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