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민칼럼]고향을 버린 대통령들

  • 입력 2002년 11월 11일 18시 03분


미국 대통령들의 귀소(歸巢)본능은 감탄스러울 정도다. 임기가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 향지를 위해 남은 인생 바치는 것을 전통 삼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최초의 예를 만든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두 번의 임기 후 ‘한번 더’를 외치는 국민의 요구를 뿌리친 채 고향 마운트버넌에서 위엄 있는 여생을 보냈다. 가장 무능했다는 14대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은 주민들의 반대에도 악착같이 고향을 찾아 그들과 어울리기 위해 애썼다.

퇴임 후 고향인 미주리주 생가로 돌아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옛 친구들과 어울려 보낸 ‘보통사람으로서의 삶’ 20년 때문에 더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지미 카터 대통령은 퇴임 후 조지아주에서 주일학교 선생님을 하면서 어린이들의 신앙심을 싹틔우는 데 힘썼다니 이 얼마나 값진 봉사인가.

▼´낙향의 삶´ 외면 정치판 훈수▼

낙향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수도 워싱턴에 남아 정가 언저리에서 빈둥거리며 살았던 경우는 없다. 국가에 대한 봉사가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 ‘훌륭한 이웃’이 되는 것을 생의 한 과정으로 여겨온 이들은 그래서 권좌를 떠난 후에도 식지 않는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어떤가. 애석하게도 지방출신 대통령 가운데 퇴임 후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은 역사상 단 한 명도 없다. 한때 “대통령이 퇴임 후 고향에 내려가 여생을 보내는 것이 당연시되는 역사를 만드는 게 나의 소망”이라고 거창하게 선언하고 고향인 대구의 한 아파트에 ‘입주’한 이가 있었다. 그러나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는 집들이 때 이웃에게 돌린 시루떡이 채 식기도 전인 사흘 만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 그 후 연희동을 떠난 적이 없다.

외환위기의 어두운 분위기에서 은퇴한 또 다른 이는 상도동과 거제도 향리를 놓고 측근들이 격론을 벌인 끝에 고향 쪽을 거처로 선택했지만 청와대 경호실이 경호상 문제를 들어 틀었다고 한다. 거제도가 정말 경호상 불리했는지 아니면 경호원들이 지방에 가기 싫어서 지어낸 이유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어쨌든 새로운 기록 하나가 탄생할 뻔했던 아쉬운 순간이었다.

대통령 지낸 분들이 이렇게 서울을 고집하다 보니 서울은 시도 때도 없이 그들의 행차길 열어드리느라 교통혼잡에 시달려야 한다. 사저 근처 주민들은 시위대들 때문에 집값 떨어지는 걸 얘기도 못한 채 속앓이를 해야 한다. 청와대가 이따금 밥상 차려놓고 전임자들 초대할 때 달려가기 편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이분들이 서울에 사는 한, 수도권 집중현상과 지방 푸대접은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대통령에서 물러난 이들이 서울에 주저앉아 해대는 정치판 훈수 때문에 나라가 혼란스러워지는 경우를 수도 없이 목격해왔다. 하긴 정치적 영향력을 갖는 게 이들의 서울체류 주목적인지도 모르지만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까 ‘영도다리’가 어떻고 ‘목포 앞바다’가 어떻다는 식으로 대통령들의 고향이 정적들에 의해 조롱거리로 전락하는 것이다.

예컨대 고향 합천의 어느 산사에서 속죄의 불공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지역의회 의원으로 향지 발전을 지도해 나간다면 당신에 대한 군사독재자의 인상은 다소 순화될 수 있을 것이다. 대구로 돌아가 지방 대학에서 ‘북방정책’ 같은 대통령시절의 중요한 경험을 강의한다면 국민은 당신의 비자금사건도 잊어줄 수 있다. 정치와 단절한 채 거제도 앞바다가 보이는 생가에서 그윽한 묵향 속에 서예로 수양생활을 한다면 당신을 다시 민주투사로 기억할 국민이 많을 것이다. 대통령까지 지내놓고 귀향을 거부하는 것은 정치적 성취의 배경인 고향을 배신하는 일이다.

▼툭툭 털고 가는 일 그리 어렵나▼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우리는 또 한 명의 전직 대통령을 보게 된다. 동교동 사저 신축을 둘러싸고 말들이 많았지만 만일 새 퇴임 대통령이 하의도로 귀향해 서해바다의 낙조를 배경으로 책 쓰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당신에 대한 공과는 어느 정도 재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에 남아 또다시 패거리 정치의 수장으로 군림하는 것보다 국가에 봉사하는 큰 기회를 준 고향사람들을 위해 여생을 보낸다면 그것이 노벨 평화상 수상자의 품격에 더 어울리는 모습이 아닐까. 어떠세요, 가시지요.

이규민 논설실장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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