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형 열린마음 열린세상]'애플데이'를 기다리며

  • 입력 2002년 10월 16일 18시 19분


김군의 등교 거부 선언은 부모에겐 충격이었다. 착하고 공부도 잘 하는 아이였기에 더욱 그랬다. 학교 갈 재미가 없다는 게 이유의 전부였다.

문제의 발단은 참으로 사소한 일에서 비롯됐다. 짝꿍이 돈 1000원을 빌려 달라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었다. 정말 돈이 없었다. 너무 미안했다. 짝꿍이 오해나 하지 않을까 두렵기도 했다. 한데, 그의 걱정은 현실로 나타나는 것 같았다. 그후 둘 사이가 서먹하게 되었다. 반 아이들도 노랑이라고 흉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한마디 변명이나 사과도 할 용기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한 탈출구는 학교를 그만두는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 완벽을 강요하는 부모의 압력을 못 견뎌 결국 부모를 살해한 대학생이 온 나라를 충격 속으로 몰아 넣었다. 그 학생을 심층 면담한 한 교수의 결론은 더욱 우리를 안타깝게 했다. 그 부모가 미안하다고 사과만 했더라도 그런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그의 결론이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과가 미움과 반목으로 가득 찬 우리 사회에 화해의 가교를 놓아주리라. 정부나 정치 지도자는 국민에게, 부모는 아이들에게, 이웃에, 그리고 학교에서 선생이 혹은 학생끼리, 쌓인 앙금을 풀고 서로가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다면.

이런 소망이 간절히 가슴에 메아리친다면 10월 24일, ‘화해의 날’을 기억하자. 지금 인터넷을 통해 이 아름다운 운동이 조용히 번져가고 있다. ‘학교 폭력을 걱정하는 국민협의회’를 중심으로 학생 교사 학부모 사이에 자연스러운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이 날을 ‘화해의 날’로 정해 행여 나로 인해 마음이 아팠을 사람에게 사과를 하자. 그리고 사과의 징표로서 사과(Apple)를 보내자. 그리하여 향긋한 냄새, 맛있는 사과처럼 우리 관계도 다시 정겨운 사이가 되게 하자. 밸런타인의 초콜릿보다 더 달콤한 사과를 보내자. 그로서 그의 아픈 마음을 달래자. ‘애플데이’(Apple day)는 이런 취지로 소리없이 무르익고 있다.

말 한 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 “미안해!” 이 한 마디의 위력은 엄청나다. 모든 게 용서되고 서먹했던 관계가 다시 부드러워진다. 그런데도 우리 민족은 사과에 참 인색하다. 젊은 세대는 더욱 그러하다. 인간 관계에선 반목, 대결, 그러다 싸움도 일어나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싸우고 토라지고 화해하고’, 이게 사람 사이의 기본이다. 이런 경험이 쌓여 우리는 성숙한 인간 관계를 유지해 갈 수 있다.

불행히도 요즘 젊은이는 이 소중한 체험을 해보지 못하고 자란다. 외톨이, 외동이가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골목 동무마저 사라지고 모두들 인터넷에만 매달려 있으니 또래들과 다투고 토라지고 할 기회가 도대체 없다. 이런 아이가 자라면서 인간 관계에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이를 다시 복구할 능력이 없다. 그러기 위해선 사과하고 화해를 해야 하는데 이게 안 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고(中高) 탈락생이 1년에 6만명이다. 사연은 갖가지지만 그중 상당수는 정서적, 성격상 문제로 인간관계가 잘 안 되기 때문에 학교를 떠난다. 왕따, 폭력이라도 당해 보라. 학교 갈 재미도 없거니와 무서워서도 못 간다. 그리곤 좌절, 분노, 복수의 이빨을 간다. 한 마디 항변조차 못하다가 어느 날 폭발하면 끔찍한 복수극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하는 부탁이다. 중고 시절의 친구는 평생의 자산이다. 내가 어려울 때 남 먼저 달려오고, 음식점을 열어도 단골 손님이 되어주고, 시의원 출마를 해도 내 일처럼 선거 운동을 해주는 사람도 중고 동창들이다. 이 소중한 평생의 자산을 원수로 만들다니! 주먹이 통하는 시기는 인생 백년에서 정말 잠시다. 그 잠시를 못 참아 평생의 친구를 원수로 만들 순 없지 않은가.

그리고 내게 몹쓸 짓을 한 사람에게도 사과를 보내자. 용서하는 의미로! 그게 진정한 강자요, 승자다.

어디 학교만이랴. 직장에서, 가정에서, 혹은 이웃간에도 진심어린 사과를 담아 사과를 보내자. 그리하여 우리 사회가 온통 화해의 물결로 넘치게 하자. 아름다운 뜻을 가슴 깊이 새긴다면 다시는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진 않을 것이다. 사람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잃지 않게 나를 지켜주는 징표로서도 사과를 보내자.

세계에서 가장 맛있고 향긋한 사과를 먹으면서 그의 따뜻한 인간미를 되씹어보자. 그간 쌓인 앙금이 가을 바람과 함께 말끔히 가시고 우리 사이엔 아름다운 우정의 가교가 다시 놓이게 될 것이다.

이시형 사회정신건강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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