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DJ의 불행

  • 입력 2002년 9월 13일 18시 26분


얼마전 김대중(金大中·DJ) 대통령은 외신기자들과의 만남에서 “두 자식 문제가 내 평생 최대의 불행한 일이었다. 항상 국민과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럴 것이다. 두 아들을 감옥에 보낸 아버지에게 대통령 자리인들 바늘방석이 아니겠는가. 노벨평화상은 무엇이며 권력은 또 무엇인가. 노(老)대통령의 비탄이 손에 잡힐 듯하다.

돌이켜보면 감회는 DJ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 그를 지지해 온 많은 이들 또한 기가 막힐 것이다. 어쩌다가 DJ의 처지가 이토록 궁색해진 것일까. 민주화 투쟁의 빛나는 역사는 빛 바랜 사진첩에나 들어있을 법하고 실질적 여야(與野) 정권교체라는 헌정사의 첫 장도 이미 낡아버렸다. 이 가을과 겨울이 지나고 새 봄이 오기 전 그는 떠날 것이다. 3김 시대의 씁쓸한 퇴장이다.

▼´내편´조차 밀어내는 격▼

DJ의 불행이 ‘자식 문제’에서 온 것은 아니다. 보다 본질적인 DJ의 불행은 그가 개혁세력의 외연(外延)을 넓히고 끌어안는 데 실패한 데 있다. 개혁을 하려면 개혁을 주도할 세력이 있어야 한다. 없으면 만들고 부족하면 늘려야 한다. 그래야 개혁에 힘이 붙는다. 그러나 DJ는 그 매우 중요한 일을 소홀히 했고 오히려 어느 면에서는 스스로 그 폭을 좁혀 버렸다. 그러잖아도 이념적 정파적 지역적으로 소수정권인 터에 ‘내편’을 만들기보다 밀어내는 격이었으니 개혁에 힘이 붙을 리 없다.

맹목적 지역주의와 맞물린 완강한 반(反)DJ 정서 속에서 그의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냐는 말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이는 결과에 따른 해석이기 쉽다. 왜 반DJ 정서가 높아졌느냐는 점을 따져 본다면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를 구분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DJ는 누구보다 성공할 수 있는 조건을 갖고 시작했다. 97년 말의 국가부도위기는 말 그대로 기회였다. 최악의 조건은 역으로 성공의 기회를 제공한다. 나라가 더 이상 나빠져서는 안 된다는 국민의 위기의식은 단합을 부르고 그것은 지도자에게 더할 수 없이 좋은 조건이다. 대중의 자발적 금모으기운동 같은 일은 아무 때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DJ는 초기의 국민적 에너지를 개혁의 동력으로 끌어내지 못했다. 그는 위기극복이란 초기 성과에 자족한 나머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사실을 깜빡한 듯 싶다. 언제라도 자신을 싫어할 준비를 하고 있는 민감한 다수의 존재를 잊은 듯했다. 위기를 알리는 빨간 불은 일찍 켜졌다. ‘옷로비 사건’이 그것이다. 그러나 DJ는 경고등의 의미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 소수정권을 지탱해 줄 도덕적 권위가 무너지는 소리를 듣지 못한 채 언론의 마녀사냥이며 기득권층의 저항이라고 몰아붙였다. 언제라도 그를 싫어할 준비를 하고 있던 다수가 급속히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DJ가 ‘끼리끼리식 인사’의 인화성(引火性)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는 점이다. 비록 오랜 영남정권하의 인사편중을 시정한다는 명분이 있다고 해도 DJ는 아주 조심스럽게 인사문제를 다뤄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권력기관을 중심으로 새로운 인사편중이 넓고 빠르게 진행됐다. 그러자 언제든지 그를 싫어할 준비를 하고 있지 않던 상당수까지 그로부터 등을 돌렸고 개혁의 기반은 분열하고 와해됐다.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트 니부어는 “한 개인은 도덕적인데 패거리가 되면 부도덕하거나 비도덕적이 된다. 공동의 이해관계가 생겨나면 그에 따른 공범자 의식이 자리잡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DJ가 자신의 최대 불행이라고 한 두 자식의 문제나 권력 측근의 부패 역시 니부어씨의 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면 DJ의 불행은 집권 초기부터 예고되어온 것인지도 모른다.

▼국민이 불행하다▼

이제 문제는 다음 정권을 누가 잡든 ‘또 다른 불행’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3김 시대를 청산하고 새로운 개혁을 한다고들 하지만 정당은 여전히 지역당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고 정치의 수준은 아직 낮다. 이미 보아왔듯이 지역당은 권력의 연고주의를 부르고 패거리 권력은 필연적으로 부패를 낳는다. 이런 속이 그대로 있는 한 겉이 바뀐다고 무엇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겠는가.

대통령후보라면 ‘아니오, 이렇게 달라질 수 있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국민을 감동시킬 수 있어야 한다. 감동으로 국민의 동의를 얻는 것, 그것이야말로 개혁세력의 폭을 넓히는 지름길이요, 그럴 때만이 개혁이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그런 큰 리더십은 보이지 않고 천박한 정쟁(政爭)만 계속되고 있으니 진정 불행한 쪽은 국민이다.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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